작성자 | 사사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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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04-06 23:20:54 KST | 조회 | 93 |
제목 |
미 국무성의 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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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예전 글이나 재탕해야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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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무장관으로서의 내 생활에는 인종 차별주의가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 1960년 초, 워싱턴 DC에는 남부의 다른 도시-이점에 있어서는 북부지방도 다를 바 없지만-에서와 마찬가지로 흑인과 기타 소수 민족에 대한 편견이 만연했다. 이 같은 비극적인 상황 때문에 미국의 외교 정책에는 상당한 문제가 생겼다. 미국에서의 인종 차별 실태와 신생 독립국에서 파견된 외교관들에 대한 차별 대우가 이들 국가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워싱턴 주재 흑인 대사들은 다른 대사관을 제외하고는 어디에서 점심 또는 저녁 식사를 해야 할지 몰랐다. 최고급 레스토랑과 호텔에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메트로폴리탄 클럽'은 흑인 손님을 받지 않았으며 그보다 좀 더 자유로운 '코스모스 클럽' 역시 흑인 멤버가 없었다. 흑인 대사들은 집무실뿐만 아니라 가족과 부하 직원들이 살 만 한 집을 구하기도 대단히 어려웠다. 가족을 메릴랜드와 버지니아에 있는 공공 해수욕장에 데려가면, 거절만 당할 뿐이었다. 대사의 부인들은 이런 낭패를 당하지 않기 위해 국무성 직원의 부인들에게 슈퍼마켓에 같이 가자고 부탁하곤 했다. 흑인 대사들이 미국의 다른 지역을 방문하길 원할 때에는, 국무성 직원을 미리 그 곳에 보내어 여행 수속을 마치게 함으로써, 이들을 당황하게 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국가들에 대한 대사관 신설 부지 또는 건물을 물색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한번은 새로 부임한 흑인 대사 한명이 집무실로 나를 찾아와서 다소 불안한 기색을 하며, "장관님, 어디에 가면 머리를 자를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모른다고 말해야하는 것이 가슴 아팠다. 내가 가는 곳, 즉 집무실 옆에 있는 작은 방에서 머리를 자를 수 있으며, 언제라도 원한다면 60초 이내에 이발사가 들어올 것이라고 했다.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던 중, 외국 외교관들이 관련된 인종 차별 문제가 수십 건 나에게 보고되었다. 한번은 독립하게 되는 서아프리카 국가에서 부임한 대사가 워싱턴에서 피츠버그로 여행하던 중, 어느 레스토랑에 들어갔는데 거절당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이 아프리카 전역에 보도되었고, 국무성은 이를 수습하느라고 진땀을 뺐다. 결국 그 레스토랑은 방침을 바꿔, 손님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종에게 개방했다. 지방 당국은 그 대사가 다시 한 번 방문하도록 초청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건으로 입은 타격은 좀처럼 원상회복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또 한 번은, 아프리카 대사가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러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가던 중, 한 노변 음식점에서 거절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케네디 행정부가 출범한 지 얼마 안 되어, 한 흑인 유엔 대표가 뉴욕으로 가던 중에 마이애미에 내렸다. 탑승객들은 점심 식사를 위해 모두 내렸는데, 백인 승객들은 공항 레스토랑으로 안내되었지만, 그 흑인 대표는 격납고 구석에서 접었다 폈다 하는 간이 의자와, 밀랍종이로 싸인 샌드위치만이 제공되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뉴욕에 갔더니, 그곳에 있는 미국 대표가 인권 문제에 대해 그에게 한 표를 부탁하더라는 것이었다. 그 대사는 나중에 자국의 수상이 되었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가 미국에 대해 계속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때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마이애미 공항 당국에게 이 문제를 시정하지 않으면, 정부는 다른 곳으로 공항을 이전시키겠다고 했다. 다행히도 이들은 우리의 명령을 들었다. 국무성의 '의전국'은 인종 문제에 대해 수없이 많은 사건을 문서화했다. 아프리카 국가의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참사관이 한 번은 이 같은 차별대우에 대해 내게 서신으로 보내왔다. 나는 이 편지를 '의회 기록'에 올렸다.
'결과적으로 흑인 외교관은 격리되어 있습니다. 혼자 틀어박혀서 자국의 사람들만을 만납니다. 따라서 부하 직원들이 계속해서 분개하고만 있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들도 많습니다. 미국은 좋은 점도 많습니다. 후진 국가들을 위해 미국은 너무도 훌륭한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우리는 본국에 있을 때보다 더욱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러나 이곳 미국에 와 있는 우리들은 모두 '나는 이방인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정책에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모든 정책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말과 행동과의 불일치와도 같은 것입니다.'
국무성 직원들 역시 편견의 대상이 되곤 했다. 스프링 밸리에 사는 이웃 사람인 칼 로원은 미국 해외정보국 (USIA) 국장이었는데, 하루는 잔디를 깎고 있으려니 캐딜락 한대가 다가왔다. 뒷좌석에 앉아있던 여인은 유리창을 내리더니, "여보세요, 이 잔디를 깎는 데 얼마를 받습니까?"라고 외치는 것이었다. 칼은 그 여자를 향해서, "사실은 이 집의 안주인이 잠자리를 함께 하도록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캐딜락은 가버렸다.
차별대우가 상당수의 외국 국가들과 진실 된 관계를 맺는데 심각한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국무성은 일찌감치 이 문제를 공격하고 나섰다. 나는 앤지어 비들 듀크 의전대사와 의전국에게 워싱턴 주재 외교관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도록 당부했다. 아프리카 외교관들은 듀크의 사무실로 집, 학교, 또는 외상 거래 계정을 개설하거나 탁아모를 고용하는 데 애로사항이 있으면 보고하도록 했다. 듀크와 아프리카 문제 담당 국무성 차관보인 매넌 윌리엄즈는 아프리카 대사관으로 직접 찾아가서 불만 사항을 구체적으로 들었다. 뿐만 아니라, 워싱턴 부동산 중개업자들을 만나서 사정을 설명하고, 아프리카 외교관들이 아파트를 구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우리는 이 문제 해결에 정말 어떤 진전이 이루어지려면-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워싱턴, 아니 미국 전역에 걸쳐 인종 차별 문제가 해소되어야 한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되었다. 미국의 흑인들에게 금지되어있는 특권과 서비스를 아프리카 외교관들은 누릴 수 있다고 기대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식사를 하거나 이발을 하려고 할 때마다 외교관 여권을 제시하도록 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명분의 옳고 그름 문제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이유에서 국무성은 인종 차별 제거 노력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우리는 주 및 지방 당국-부동산 중개 단체, 호텔 소유주 경찰 당국, 시 위원회-과 광범위하게 작업하여, 점진적인 해결을 보고 있었다. 우리는 지방의 사회봉사 위원회 및 시민 자원 봉사 단체의 기능을 강화하여, 그 지역을 방문하는 외교관과 외국 손님들이 있으면 정중하게 대접을 하도록 했다. 또한 '인터내셔널 클럽'을 결성하여 모든 외교관들이 환영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국무성은 1964년 및 1965년 '인권법' 특히 공공숙박 시설에 대한 법안을 최선을 다해 지지했다.
국무성 그 자체도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에 인종 차별에 완전히 담을 쌓을 수만은 없었다. 1961년에는 비교적 적은 수의 흑인이 외무 직원의 자리를 맡고 있었고 흑인 대사는 없었다. 국무성에서 흑인들이 하는 일이란, 사환, 수위, 안내직 등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분명 국무성 내에서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따라서 나는 인종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룰 부서를 신설했다. 칼 로원과 매널 윌리엄즈 모두 이 위원회에서 근무했다. 또한 윌리엄즈를 국무성에서 기회 균등 담당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즈는 특유의 정열로 국무성을 개방하는데 힘을 썼으며, 인종 차별을 경험한 바 있는 외교관들의 기분을 풀어주는 데에도 노력했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 시절, 국무성은 흑인 직원의 직급을 올려주고, 외무 직원으로 자격을 갖춘 흑인들을 채용했으며 흑인들도 대사에 임명했다. 상황을 진척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대사의 자격을 갖춘 흑인들은 인권 운동이 진전됨에 따라 다른 곳에서도 일자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따라서 상당수가 우리의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다.
국무성에 신설된 특별 위원회는 절대 다수가 흑인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외무고시에 합격되는 사람이 거의 없는 반면 버클리, 시카고, 아이비리그 대학 출신의 흑인들은 많이 등용되는 것을 보고, 시험 내용에 어떤 문화적 편견이 담겨 있는지 조사해 보도록 했다. 그러나 문제는 문화적 편견이라기보다는 연습과 테스트 기술이 부적절했기 때문이라고 판명되었다.
외무 시험이 어렵다는 것은 인정한다. 매년 16,000여 명의 응시자 중 불과 3,000명만이 합격한다. 이 시험은 외무 직원 적체 현상을 줄이는 데도 목적이 있기 때문에, 흑인 외무 직원을 더 원한다 해서 시험 기준을 완화하게 되면 자격이 의심스러운 사람도 들어오게 될 수가 있다. 따라서 기준을 완호하지는 않았지만, 완화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일부 사람들은 인종 차별 철폐 움직임에 저항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흑인 외무 직원을 채용하는 데 큰 역점을 두었다. 필기시험에 합격된 흑인 응시자는 보통 임관되었다. 구두시험에서 떨어지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하지만 들어와서 자리를 잡는 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상당수 흑인들이 승진하는 데 차별 대우와 문제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에게는 '외무 직원'이라는 것이 직업 경력상 진정한 기회를 제공한다는 확신이 없었다. 바로 이 이유 대문에 상당수의 훌륭한 인재를 놓쳐버렸던 것이다.
내가 해결하려고 했던 또 다른 문제는 국무성의 하위직에 흑인들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7층에서 근무하는 사환들은 전부가 흑인이었다. 그래서 백인 한 사람을 사환으로 임명하여 인종 차별 철폐의 의지를 보여주려 했지만, 이 같은 뜻이 전달되지 못했다. 흑인 동료들이 냉대하여서 얼마 못가서 그만두고 말았다.
핀란드 주재 대사인 칼 로원은 미국 최초의 흑인 대사 중 한사람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아프리카의 외무 장관이 아프리카에는 흑인 대사를 보내지 말라고 충고했다. 흑인 대사는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으로, 백인 대사는 아프리카로 보내야 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국 사회에서 흑인이란 여전히 2등 시민이기 때문에, 아프리카 흑인 국가에 흑인 대사를 임명한다고 하며, 이것 역시 2등 임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라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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