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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3-09-11 18:50:27 KST | 조회 | 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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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C 예술 다큐멘터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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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1(서재)
(고풍스럽게 꾸며진 서재 안. 시인 로코코가 의자에 앉아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로코코: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시는 무엇인가? 시인이란 무엇인가? 그럼 저는 이렇게 대답하죠. 시는 랑그와 파롤의 격렬한 충돌이 만들어낸 파생물이오, 시인은 세상의 비밀을 움켜쥔 장님이다. 시인이란 그런 존재입니다. 그 불같은 아이러니! 개념을 물질화하고,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새롭게 빚어내는 예술가들이죠. 그들은 눈 먼 구조주의자들이고, 관념을 쫓는 유물론자들이고, 추론하는 성직자들이며, 신앙심 깊은 과학자들이란 말입니다.
하지만 시인이 일반인과 구분되는 가장 명확한 점은 역시 천부적 재능에 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재능이 있죠. 암기의 재능, 수학의 재능, 논리학의 재능 등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재능을 타고났을 겁니다. 하지만 오스카 와일드가 말했잖습니까. 재능 중 가장 상위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사실 재능 그 이상의 것이죠. 그것은 완전히 천부적이니까요. 시인은 천부적인 미학의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입니다. 오로지 천재성만이 그들을 다듬어낼 수 있죠. 네, 그리고 난 시인입니다.
나레이터:어떻게 시인이 되셨죠?
로코코:사실...그건 일종의 운명과 같았달까요. 구체화되지 않은 운명이었죠. 솔직히, 요즘처럼 문학이 죽은 세상에 누가 "나는 시인이 될꺼야!" 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건 미친 놈이죠. 하지만 세상에는 숙명이란 게 있어요. 아무리 거부해도 이 저주받은 재능이, 거의 본능적으로 나에게 속삭이는 겁니다. 넌 이 길 뿐이야. 민족과 인류의 진보를 위해서 너에겐 오로지 이 길 밖에 없는 거야...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면 난 어느새 운명이란 놈의 속삭임에 홀려 있는 거죠. 네. 나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건 사실이에요. 마치 내 머리 속으로 불벼락이 쇄도하는 것 같았어요. 난 내 정신의 초원에서 치솟아오르는 용암을 통해 격정적인 신의 윤곽을 보았습니다. 그것이 내 눈을 멀게 만들었죠. 나는 눈 대신 손으로, 촉각으로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뭐...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습니다만, '천재 시인' 이라고 떠받들어지고 있더군요.
(로코코가 책상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이건 제 천재성에 주어진 작은 보상 중 하나입니다. 보이시나요? 2007년에 XX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죠. 당시 평론가가 어떤 평을 내렸는지 들려드리죠. 제가 그걸 복사해서 액자로 하나 만들어 가지고 있거든요. 아, 이렇게 썼네요. "로코코는 분명 우리 세대의 시인들이 발굴해 낸 가장 영롱한 원석 중 하나일 것이다. 그의 시어에는 힘이 깃들어 있다. 시의 완급 조절 역시 뛰어나다. 그는 때로는 불처럼, 때로는 초목처럼 자신의 얼굴을 능수능란하게 바꾸며 독자들을 향해 저돌적으로 다가선다. 그의 언어는 너무나 적절한 공간에 적절히 배치되어 있기에, 마치 그 시가 원래 그렇게 쓰여져야만 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하하. 뭐, 물론 나는 평론가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은 시인들이 고혈로 짜낸 빛나는 수의를 좀먹는 벌레에 불과할 뿐이죠. 하지만 벌레라고 해서 모두 장님인 건 아닙니다. 적어도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 한 두명 쯤은 있기 마련이죠. 아, 칸트가 지금의 나를 봤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결국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며 내 발등에 입을 맞추지는 않았을까요? 뭐, 농담입니다만.
나레이터:동년배 시인들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인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낀다고 말씀하셨는데...
로코코:아...그건 사실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나는 그야말로 자수성가 스타일의 시인입니다. 내게 주어진 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아, 물론 내 손에 지금 가득 주어진 "천부적 재능" 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있죠. 나는 평생 내가 노동자와 약자의 편에 선 사람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 운명이란 놈이, 나의 재능이 나를 기어코 지배자의 위치로 끌어올려버린 겁니다. 나는 미안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찌하겠습니까? 내가 내 손을 스스로 잘라내고 다시 거지 소굴로 돌아갈 순 없잖아요? 내게 흘러들어오는 금은보화를 어떻게 막겠습니까? 때때로 운명은 잔혹하게 굴 때가 있지만, 결국에는 공정합니다. 비록 나와 같은 시기에 등당한 시인들은 내 천재성에 가려져 그 빛을 잃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은, 이 나라는 로코코라는 초신성같은 천재시인을 얻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 천재시인이 어둠에 감싸인 이 국토의 등불이 되어주겠죠. 하하하.
S2(출판사)
로코코: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게 이겁니다. 시인은 어떻게 돈을 법니까? 글쎄요. 사실 소설가들이나 자기계발서 작가들 같은 경우에는....그 "문학계를 좀먹는 놈"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뜨기만 하면 꽤 돈을 벌 수 있죠. 하지만 시는 확실히 돈을 벌기 힘들어요. 사람들이 시집을 잘 사는 것도 아니니까. 그야말로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한 사람을 위해 나머지 99명이 희생하는 거랄까. 참 비극적인 일이죠. 어쨌든 이번에는 제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알려드리겠습니다. 자, 이 출판사는 제 첫 시집을 발간해줬던 곳이에요. 나와 계약하기 전에는 작은 영세 출판사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규모가 엄청나지요. 나의 세례를 받은 겁니다.
(로코코가 출판사 안으로 들어간다.)
편집장:아! 당신...아...로코코 씨로군요.
로코코:안녕하세요. 여전히 건강해 보이시는군요.
편집장:음...네. 근데 저, 오늘은 시간이 좀...
로코코:걱정하지 마세요. 빨리 끝낼테니까요. 아니, 나는 빨리 끝낼 생각은 없지만, 당신은 내 시구를 한 구절 읽는 것 만으로도 내 문학성의 포로가 되버릴 겁니다. 예전에 제 천재적인 첫 시집을 읽었던 때처럼 말이죠.
편집장:아..네...물론 그렇긴 한데...
로코코:이게 제 두 번째 시집입니다. 타이틀 시는 최근 제가 가장 잘 썼다고 생각되는 <남산 위에서:형식주의자들에게 고하다> 라는 파격시죠. 아주 과감하고 아방가르드한 미학이 가득합니다. 그럼 지금부터 조금만 읽어드리겠습니다.
편집장:아..네...뭐, 일단 들어보죠.
로코코:흠, 크흠. 그러니까 처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제가 남산 위에 올라가서 느낀 것을 파격적인 언어로 옮긴 거지요.
내가 맨발로 흙과 돌로 지은 남근 위에 올라섰을때
발가락 사이로 자라났던 파랗고 이질적인 풀잎은
언어의 거리감에 대해 생각했을까
처음부터 아주 강렬한 철학적 주제가 나옵니다. 나는 일부러 보편적인 단어를 사용했어요. 산은 흙과 돌로 지어진 남근이요, 풀잎은 그 모습 그대로 이질적입니다. 이것은 시작부터 저 고결하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에게 비판의 화살을 겨누는 겁니다. 언어를 낯설게 하여 문학의 긴장감을 유발시켜라?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 문학계는 지금까지 본질을 잊고 있었던 겁니다! 바로 가장 보편적인 언어로 미학을 추구해야 한다는 본질 말입니다.
편집장:아...네...
로코코:하지만 가장 흥미로운 건 다음부터입니다.
남산은 선이다. 직각의 모더니즘과 비선형적 야만성이 가득한
그 지형적 첨탑 위에서 나는 생각한다. 운율, 파격, 그리고 자연의
동선을. 동어반복은 폭력이 아니며, 진부함은 세련됨과 같다.
남산의 뿌리 끝과 꼭대기를 관통하는 양극은
결국 똑같은 방향을 향해 있나니.
편집장:...말씀 끝나셨나요?
로코코:........죄송합니다. 저는....(로코코가 울음을 터뜨린다)
편집장:무, 무슨 일이시죠?
로코코:이 시의 광활함. 그 아름다움. 너무나 거침없고 과감하지만 견고한 논리성...그 모든 것에...충격을 받아버렸습니다. 감탄이 극에 달하니 눈물밖에 안나오네요. 이 시는...정말, 인간이 쓴 시가 아닙니다. 어떤 거대한 절대적 지성이 내 뇌에 영감을 불어넣어준 거죠.
편집장:그, 그러시군요...
로코코:이 시는...결국 모든 것은 똑같은 방향을 향해 있음을 말해줍니다. 남산의 꼭대기와 시작점은 양극이 아닙니다. 고저차일 뿐 결국 똑같은 방향으로 화살표를 그리죠. 진부함은 세련됨과 같고, 모든 것은 한 방향이니 동어반복은 더 이상 시의 해악이 아닙니다. 보편성은 파격성이며, 파격시는 정형시가 됩니다. 나는, 나는...오 젠장. 나는 지금 우리 시단의 미래를 파괴해 버렸습니다.
편집장:하, 저기. 저 이제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합니다.
로코코:무슨 약속이시길래요?
편집장:이번에 이외수 작가님이 새 책을 내시는데...하여간 그 분은 인기도 많으시잖습니까. 이건 꼭 따내야겠다 싶어서 말이죠.
로코코:이외수요? 지금 이외수가 중요합니까?
편집장:어쨌든 잘 팔리니까 회사를 위해 중요합니다
로코코:말세로군요. 그런 쓰레기도 책을 내는 세상이라니.
편집장:그럼 그...천재성을 좀 줄이시고 좀 더 잘 팔릴만한 책을 쓰시는 건 어떻습니까?
로코코:난 언제나 대중을 염두해두고 씁니다.
편집장:하지만 판매량은 안나오잖아요. 저번 시집은 1쇄 2000부 중 3부만 팔렸...
로코코:제길! 당신도 결국 자본주의 속물이 되어가는군! 나 가겠어!
(로코코가 문을 박차고 뛰쳐나간다.)
S3(길거리)
로코코:정말 화가 나네요. 이제 진짜 책을 읽고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은 없나 봅니다. 하, 정말. 우리 문학계는 너무나 암울합니다.
나레이터:수입이 끊겨서 어떡하죠?
로코코:단순히 책 팔아서 먹고 사는 건 아닙니다. 그 이외에도 돈줄은 꽤 많죠. 뭐 어쨌든 오늘은 일을 너무 열심히 했으니 잠시 휴식을 취해야겠어요.
S4(편의점)
로코코:멘솔 하나 주세요.
직원:네. 2700원이요.
로코코:(지갑을 뒤척이다)생각해보니 금연을 좀 해야될 거 같아요.
(로코코가 거리로 나온다)
로코코: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시인들은 창작의 고뇌를 끝없이 하기 때문에 몸이 잘 상하는 편이에요. 그런데 거기에 담배까지 피우면? 그야말로 골로 가는 거죠. 제가 요절할수록 인류는 더 많은 손해를 입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는 제 몸을 좀 더 소중히 관리할 필요가 있는 겁니다. 제 몸은 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거든요. 공공재죠. 물론 제가 몸을 파는 건 아니지만.
나레이터:아무 일이나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요즘 전업 작가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로코코:제가 일을 구하지 않는 이유는...이것 만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필요하다면 저도 일을 구하겠죠. 하지만 그건, 그냥 적성에 맞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저는 비대한 관료제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혐오스럽거든요. 저에게는 자유와 목가적인 삶이 더 맞죠. 올바른 정신을 함양하는데도 도움이 되구요.
어쨌든 굳이 2집을 내지 않아도 돈을 벌 길은 있습니다. 저는 이미 수상경력으로 명성을 쌓은 시인이니까요. 그리고 이런 현명한 시인들의 말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죠.
S5(서재)
로코코:대학! 대학은 지식의 보고입니다. 그리고 작가 지망생들도 바글바글하죠. 뭐 그들 중 대부분은 도중에 꿈을 포기하고 자살하거나 평범한 일반인으로 전락하긴 합니다만. 어쨌든 제 말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넘친다 이겁니다. 그냥 말을 하는 것 만으로도 돈을 주는 거죠.
(로코코가 전화를 건다)
로코코:안녕하세요 교수님. 네. 저 로코코입니다. 아, 기억하시죠? 그때 시상식에서. 네, 네. 바로 그 사람이죠. 네. <형이상학적 딜도의 신비한 욕정>, 네 그 멋진 블랙코미디 단편을 쓴 작가가 바로 접니다. 네, 물론 그때는 참가상에 그쳤지만...어쨋든 전 등단한 시인이에요. 자, 들어보세요. 교수님이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는 분명 작가 지망생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애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고리타분한 언어학 시험이 아니라, 진짜 성공한 작가의 경험담입니다. 그렇죠? 네. 아, 곧바로 알아들으시는군요. 하하하. 그렇죠. 네 이번주 금요일에 갈 수 있을 거 같은데요. 물론이죠. 저, 그래서 일단은 말인데요. 제가 지금 사실 금전적 지원이 약간 부족합니다. 생계에 지장이 간다는 게 아니라, 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돈이 좀 많이 필요하거든요. 이것저것 경비가...
씨발 뭐요, 17만원? 이 씨발 온 문학계가 주목하는 천재시인을 17만원에 부려먹겠다고? 미친, 꺼져요! 이 도둑같은 양반! 너 때문에 우리 문학계가 고통받는 거야!
(로코코가 전화를 끊는다)
로코코:(머리를 긁으며)아. 진짜...
(잠시 서재에 침묵이 흐른다)
로코코:예. 교수님. 저 아까 전화 건 로코코인데요. 그러니까 18만 5000원 선이면 어떻게든...그러니까 차비는 나와야하지 않겠습니까...네 네...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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