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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09-24 20:26:44 KST | 조회 | 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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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 리틀 포니:가족은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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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PC방 알바다. 박봉에, 온갖 쓰레기같은 인간군상을 다 상대하며 살지만 제법 적응할 만하다. 카운터에 앉아서 자판기를 두드리고 앉아있노라면 화이트칼라가 된 기분이다. 각설하고, 오늘 내가 이렇게 서투른 글솜씨로나마 장문을 남기는 이유는, 불현듯 얼마 전 있었던 소소한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날도 오늘처럼 굵은 빗방울이 죄많은 대지를 툭툭 두들기던 우울한 저녁이었다.(아, 내가 말을 안했는데 지금 내가 앉아있는 곳 너머로 난 창문 밖에서 비가 내리고 있다...) 난 그 날도 카운터에 앉아서 디아블로3에 열중하고 있었다. 갑자기 현관문이 거칠게 열리더니, 머리가 반쯤 하얗게 샌 아저씨 한 분이 빗물에 젖은 우산을 툭툭 털며 들어오셨다. 축 늘어진 그의 어깨는 흥건했다. 그는 머뭇거리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난 한 눈에 그가 PC방을 처음 이용해보는 사람임을 알아챘다. PC방 특유의 어두운 조명에 온 몸을 잠식당한 채로, 아저씨가 입을 열었다.
"학생...여기 자리 하나 있어?"
"예. 몇 시간 하러 오셨어요?"
"4시간만 해주게."
그가 호주머니를 뒤적거리며 말했다. 난 그에게 빈 자리를 하나 지정해주고, 선불로 4000원을 받았다. 아저씨가 내민 천 원짜리 지폐 넉장은 아저씨 당신의 얼굴 만큼이나 깊게 주름져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단골 손님들이 하나 둘 좌석을 뜰 때쯔음, 아까의 그 아저씨가 머뭇거리며 내게 다가와 말했다.
"미안한데 학생, 여기 먹을 게 좀 있나?"
"예. 컵라면이 좀 있는데..."
"그럼 그걸로 주게."
나는 아저씨에게 뜨거운 컵라면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모니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일었다. 보통 리니지나 디아블로3에 심취한 일반적인 게임 폐인 아저씨들은 마우스가 으스러지도록 클릭질을 하고 있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마치 모니터 영상을 예술영화라도 탐미하듯 심각하게 응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여기 컵라면 나왔습니다."
나는 아저씨 앞에 컵라면을 내려다 놓으며, 눈을 흘겨 모니터를 슬쩍 바라보았다. 애니메이션이 재생되고 있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은 아니었고, 양키들 것 같았다. 그것도 오색찬란한 색배치로 볼 때 어린 여자아이들이나 볼 법한...나이도 지긋하신 아저씨가 이런 것에 심취해 있다니,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껴 내뱉듯이 물어보았다.
"저...그게 뭐에요?"
"음? 아, 이거 말인가?"
아저씨가 나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이건 마이 리틀 포니:프렌드쉽 이즈 매직 이라는 애니메이션일세. 다채로운 재능을 가진 포니들이 여러 사건을 해결하며 우정을 쌓는다는 내용의 애니메이션이지."
"그렇군요."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는 음울해보이는 얼굴과 안어울리는 활기찬 목소리로 기세 좋게 설명을 이어나가셨다.
"지금 나오는 저 보라색 포니가 바로 트와일라잇 스파클이지! 마법을 잘 다루는 포니야. 그리고 저기 나오는 푸른색 포니는 레인보우 대쉬일세. 한 번 내달리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지!"
"하하하. 그렇군요. 포니를 좋아하시나봐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말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비수로 가슴팍을 찔리기라도 하신 듯 몸을 움찔거리며 입을 다무셨다. 잠시 후, 그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좋아한다네."
짧은 순간 그와 나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나는 그의 메마른 동공에서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동질감?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동정심이라 하는 것이 옳으리라. 아, 그렇다. 나는 이 처량한 사내를 동정하게 된 것이다. 그 날 이후로, 아저씨는 언제나 똑같은 자리에 앉아 '마이 리틀 포니:프렌드쉽 이즈 매직' 을 시청하셨고, 그 옆자리는 언제나 내가 함께 했다.
우리는 발랄한 색감으로 자아낸 포니들의 세계를 함께 탐험했다. 그들의 천진함에 남몰래 치유받고, 남몰래 감동 받으면서, 그렇게 포니들을 통해서 은밀한 <우정> 을 쌓아나갔다.
시간이 흘러, 어느새 우리는 포니 시즌2 마지막 화, 그러니까 샤이닝 아머와 케인대스 공주의 결혼식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느닷없이 아저씨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학생. 고백할 것이 있네."
"뭐죠?"
"난 사실...포니를 좋아하지 않는다네."
솔직히 말하자면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일종의 원인 모를 의무감 때문에 그의 옆을 지키고 앉아 있었던 거지, 포니를 열렬히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아저씨는 어째서?
"그럼...왜 굳이 애니메이션을 다 보셨던 건가요?"
아저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이윽고 입을 열었다.
"내겐 아들이 있었네. 녀석은 브로니(포니를 좋아하는 남자들을 일컫는 말이다.)였어. 난 다 큰 사내놈이 이런 요상망측한 걸 봐서 뭐에다 쓰겠냐며 닥달했다네...아들내미가 군대에 가고 나서도, 난 별로 신경쓰지 않았어. 그런데 녀석이 훈련을 받다가 그만 사고로 죽은 모양이더군."
"그...그런 일이..."
아저씨는 힘없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제서야 후회가 되더구먼. 애.비란 것이...자식의 사소한 취미 하나 이해해주지 못해서 말야. 그래서 포니를 봤어. 브로니를 이해해보려 했지. 트와일라잇 스파클의 팬이 되려 노력했어. 하지만 난 여전히 잘 모르겠더구나...내가 정말 포니를 좋아해서 보는 건지, 아님 내 알량한 죄의식 때문에 보는 건지 말야. 내 스스로 값싼 면죄부를 쥐어주고 있는 건 아닌지 말야."
"아저씨..."
"포니조차 아들과 공유하지 못하는 애.비라니. 확실히 아들과 내 사이가 많이 멀어져 있었던 모양이야...영원회 회복될 수 없을 만큼이나."
말을 마친 그는 다시 침묵했다. 잠시 후 그는 PC방을 떠났고, 이후로는 영영 만나지 못했다.
글을 다 쓰고 나니 마음 한 켠에 진 응어리가 풀리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난 그 아저씨와의 짧은 만남 동안, 일종의 책임감을 느낀 건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도 가끔씩 그 아저씨의 눈매를 생각해 본다. 아무 것도 응시하고 있지 않는 공허한, 그래서 더욱 천진하게만 느껴지던 그 눈매를 말이다.
그는 과연 진정한 브로니였을까? 아니면 그가 말했던 것처럼 포니를 자신의 면죄부로 삼았던 것 뿐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 어떤 브로니도 해답을 알 수 없으리라. 심지어 아저씨조차도.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일까?
정녕, 그것이 중요한 것일까?
ps:실화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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