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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06-10 23:18:12 KST | 조회 | 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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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이야기
앞 이야기 0. 연구 기록
플라톤에 따르면, 이데아의 모조품에 불과한 현상계는 결국 이상적인 형태인 이데아와 다른, 즉 오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데아의 복제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이 오염, 또는 오차는 평행세계를 만들어내는 근본 원인이다. 원래대로라면 일직선 형태일 인과의 흐름이, 이 오차로 인해서 무한한 가지로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 가지를 모두 거슬러 올라가면 유일한 근원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상대성과 불완전성이 지배하는 현상계를 존재하게 하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원인으로.
그것을 담고 있는 것, 혹은 그렇다고 알려진 것이 바로 <아카식 레코드Akashic Records>다. 아카샤가 산스크리트어로 ‘하늘, 우주’로 번역되는 것을 감안했을 때, 풀이하자면 <우주 기록> 정도가 되는 이 <아카식 레코드>는, 존재 가능한 모든 우주의 과거와 미래를 담고 있는 도서관으로 비유된다.
그것이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단지 철학자 플라톤이 한 때 그것에 접근했었다는 의혹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 IONS(노에틱 사이언스 연구소) 명의 논문,
<변형세계의 증거>에서 발췌.
앞 이야기 1. 혜민
사방은, 온통 파란색이고, 어둡다. 가장 먼저 정면에 보이는 것은, 고풍스런 한옥 한 채. 푸른 기와가, 어슴푸레한 새벽빛을 받아 반짝인다.
숲 한 가운데. 양쪽으로는 가파른 산봉우리들이 기둥처럼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이 저택은, 꼭 바다 한가운데 세워진 성 같다.
이런 곳에 집을 짓는 사람은, 분명 굉장히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녀는 눈을 떴다.
회색 천장이 보인다. 방이다. 단조로운 방. 벽지는 바르지도 않았고, 가구는 침대, 책상, 그리고 의자 하나가 전부다. 꼭 창고 같다.
“…….”
멍하니 생각에 빠진다. 또 같은 꿈. 그 저택이 나오는 꿈을 벌써 며칠 째 꾸고 있다. 왜 하필이면 그 저택일까. 텁텁한 눈을 문질러 시간을 확인한다. 새벽 5시 5분.
개학식은 8시다. 아직은 여유가 있다. 알람도 잘 맞추어 놓았다. 아무 걱정 없이, 다시 두꺼운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앞 이야기 2. 수인
밤바람이 차갑다. 어두워서 그런지 더 차갑게 느껴진다. 새해가 엊그제 같은데, 날짜는 벌써 2월의 마지막을 달린다. 얼어붙는 날씨는 여전하다.
중남산은 동네 뒷산 정도의 낮은 산이지만, 이 시간에는 산바람이 심해서 사람이 없다. 너무 이른 시간에 깨버렸는데 잠이 안 왔다. 갑자기 산에 오르고 싶었고, 그래서 올랐다. 하지만, 단지 그 뿐이었다, 고 하는 것도, 실은 거짓말이다.
수인은, 마지막으로 고향 해성 시의 모습을 제대로 봐두고 싶었다. 굳이 그 같잖은 250m 짜리 정상에 오를 것도 없다. 중턱에 있는 휴식처에서도 온 도시를 다 볼 수 있어서, 고민을 덜었다.
해성. 이상한 지명이다. 바다의 성. 아무래도, 사방을 산으로 두른 한적한 고장의 이름으론 조금 어색하다. 항상 이상하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살다보면 그 이상함이 익숙해져 버린다. 그러면, 이상하니까 이상하지 않다는, 그런 논리가 된다. 수인은, 이런 말장난마저 꽤나 마음에 들어서, 미친 사람마냥 혼자 피식거리다가, 이내 잠자코 해성 시의 이곳저곳을 눈에 익히기 시작한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몇 시간 정도 되었을 것 같다. 아마도 2시간.
“깜짝이야.”
주머니의 느낌이 이상하다 했더니, 핸드폰의 진동이었다. 수인은 반사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낸다. 4시가 좀 넘었다. 집사님의 이름으로 문자 메시지가 와있다. 읽을 필요도 없다. 슬슬 집사님께서 빈 침대를 발견하실 시간이니, 돌아가서 야단을 맞는 것이 다음 순서다.
손에 하얀 입김을 불어넣으면서, 수인은 해성의 야경을 뒤로, 저택으로 걷기 시작했다.
바람은 여전히, 여전히 차다.
앞 이야기 3. 혜민
다시 눈을 뜬다. 얼굴이 따뜻하다. 커튼 사이로 햇빛이 스며든다. 그녀는 홀가분하게 윗몸을 일으킨다. 그렇게 기지개를 펴고, 고개를 돌리기도 하다가,
“아.”
자명종을 발견했다. 책상 위에 있어야할 것이, 떨어져있다. 다급하게 핸드폰을 확인한다. 부재 중 전화가 5통. 시간은, 예상대로, 8시 30분을 조금 넘기어 있다. 개학식은 8시.
오래 생각할 것도 없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지각이다. 혜민은 잠옷을 마구 벗으며 샤워실로 달려가, 다짜고짜 물을 틀었다.
앞 이야기 4. 연구 기록
기관, 정확히는 플라톤에 따르면, 현상 세계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이데아가 복제 과정의 오류로 셀 수 없이 많은 평행 세계, 혹 평행 우주로 나뉘어감에 따라 남기는 잔상이다. 따라서 이론적으로는, 누군가가 의식적으로 이데아의 복제 과정에 간섭할 수 있다면, 원칙에서 벗어나는 현상 세계의 재현도 가능하다. 기관은 이러한 이데아에 대한 간섭행위Irrutus를 개입이라고 정의한다.
(중략)
요컨대, 유사 이래 요술, 마법이니 하는 이름으로 불려온 기현상들이, 사실은 모두 이데아에 대한 간섭행위였고, 그것이 근본적으로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즉 이데아의 형태에서 벗어난 ‘오류’이기에 비정상적으로 보였음은, 따로 언급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 IONS 명의 논문,
<변형세계의 증거>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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