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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6-04-02 22:05:06 KST | 조회 | 3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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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B때 복팩 안쓴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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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남의 아버지는 게임 개발자였다. 그는 월요일 아침 7시에 출근해서 금요일 밤 9시에 퇴근했다. 그는 샌드위치로 끼니를 떼웠고 사무실 바닥에서 잠을 잤으며, 이른 아침엔 빌딩 공용 화장실에서 마른 비누로 거품을 내 면도를 했다. 1회용 면도날이 살갗을 너무 깊게 파고들어 그의 턱 주변은 언제나 잔상처들로 가득했다.
김강남의 아버지는 코드를 만들었다. 가끔 도트도 찍었다. 일손이 부족하면 맵 오브젝트도 배치했으며 사내 구조조정으로 기획자와 스크립트 라이터가 퇴사한 뒤로는 퀘스트도 만들었다. 개발이 끝나면 직접 QA를 했다. 그 당시 게임 개발자들은 대부분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 어쨌든 그의 팀은 가까스로 게임을 완성했다. 김강남은 아버지가 신작 패키지를 손에 들고 오셨던 때를 기억한다.
패키지 박스 테두리는 오렌지색이었고, 앞면에는 주인공 파티의 초상화가, 뒷면에는 스크린샷과 권장 사양 정보가 붙어 있었다. 마법을 부리는 여주인공의 모습이었다. <57가지 마법과 372가지 조합 스킬로 무궁무진한 전투를 벌이십시오.> 57과 372는 우주를 이루는 원자의 개수 만큼이나 광활한 숫자였다. 그것들이 모니터에서 구현되는 순간을 구경하는 것 만으로도 평생이 걸릴 것이다. 김강남은 패키지를 뜯어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꺼냈다. 였다. CD는 세 개였다. 게임 설치 CD와 게임 구동 CD, 그리고 OST가 들어 있는 특전 CD였다. 한정판을 구매한 게이머들에게 헌정하는 아트북도 들어 있었다. 아트북은 새 종이의 두근거리는 냄새와 미약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것이 김강남이 기억하고 있는 창작의 감각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판매량은 터무니 없이 낮았고, 손익 분기점을 근소하게나마 추월한 게 다행이었다. 그 해 겨울에 김강남의 아버지는 사표를 냈다. 훗날, 김강남은 그의 아버지가 만든 마지막 게임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게임의 판매량은 15만 장 남짓했으나, 게임의 1.1ver 패치 다운로드 숫자는 172만 회였다는 것이다. 그것이 김강남과 와레즈의 첫 만남이었다.
먼 발치에서 네트워크 암시장의 그림자를 흘기는 것 만으로도 김강남은 그들의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 지, 그리고 그 심연이 얼마나 깊고 썩어 문드러져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김강남은 맹세했다. 창작자들이 만든 고귀한 지적 재산권을 결코 무단으로 이용하지 않겠노라고. 절대 와레즈의 마수에 걸려들지 않겠노라고. 그는 통신망 뒤에 숨어 인터넷 지하 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거대한 무단 복제 세력에 대한 외로운 성전을 선포했다.
그래서 김강남은 GB때도 복팩을 쓰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그는 21세가 되었다. 그는 학교에 다녔고, 시간제 노동을 했고, 월급으로 게임을 샀다(아주 중요한 행위였다). 그리고 여자친구도 사귀었다. 그의 여자친구는 정상적인 사람이었다. 살짝 결백증이 있고, 자신의 권리를 침해 받았다고 생각할 때에만 공격성을 드러냈으며, 전반적으로 온화하고 동정적이었다. 김강남은 그녀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어느 날 김강남은 우연찮게 그녀의 노트북 화면을 보게 됐다. 내 컴퓨터, 한컴 사전, 한컴 오피스 한글 2001, 휴지통...Torrent. 그는 온 몸의 혈관이 표백되는 느낌을 받았다. 김강남은 노트북을 들고 여자친구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디스플레이의 토렌트 아이콘을 가리켰다. 그의 가느다란 검지가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왜 그래?"
여자친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묻자, 김강남은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묻히며 입을 열었다.
"왜 그래? 왜 그러냐구? 너 지금 그걸 몰라서 물어? 너 이, 이게...뭔지 알아?"
"토렌트...? 그래, 나도 알아. P2P는 컴퓨터 성능에 부하를 줄 수도 있다고 하더라. 그래도 나름 분별해서 사용한다구."
"허허, 분별...분별이라고..."
김강남은 힘없이 노트북을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무의식 중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이마는 이미 땀으로 번들거렸다.
"지금까지...어, 얼마나 많은 게임을 받았어?"
"얘는. 내가 그렇게 양심 없는 사람인 줄 아니? 그냥 고전 게임 몇 개 뿐이야...환세취호전이나 포켓몬스터 금은 버전 정도였다구. 어차피 요즘은 네이버 블로그에도 다운로드 링크가 있는 게임들이잖아?"
"환세취호전. 난 아직까지 그 게임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뭐?"
"환세취호전을 만든 Compile은 2003년에 경영난으로 파산했지. 그래서 지금은 어디서도 환세취호전을 구매할 수 없어. 그래서 난 그 게임을 영원히 플레이하지 않기로 했어. 수많은 와레즈와 불법 다운로드 프로그램 이용자들이 한 위대한 고전게임의 숨통을 영원히 끊어놓은 거지."
"너, 너...지금 날 비난하는 거야? 넌 얼마나 고결하다고 그래? 너는 윈도우랑 한글 파일, 뭐 그런 것도 전부 다 정품만 쓰냐?"
"물론이지."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여자친구는 팔짱을 낀 채 거실 주변을 돌아다녔고, 힘이 빠진 김강남은 의자 위에 주저 앉았다. 잠시 후 김강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처음으로 조립형 PC를 구매했을 때 딱 한 번, 불법 다운로드를 할 뻔한 적이 있었어. PC를 배달해 준 아저씨가 직접 기본 셋팅을 해주셨는데, 그때 한참 유행하던 게임이 스타크래프트였어. 너도 알다시피 그 게임은 CD키 락도 간단히 풀 수 있고 립버전도 다양해서, PC 구매자들한테 기본적으로 깔아줄 정도였지."
"그래서...?"
"난 그 스타크래프트 아이콘을 보자마자 곧바로 컴퓨터를 반품했어. 더럽혀진 하드웨어와는 상종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거든."
김강남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경악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여자친구에게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그 동안 고마웠다. 정말로 네 마음에 드는 적당히 타락한 사람을 만나길 바래."
그리고 주저없이 여자친구의 집을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김강남은 실연의 아픔과 비열한 인간 정신에 대한 실망감에 젖어 계속 비틀거렸다. 후일담 같은 후회의 편린들이 계속 머리 속으로 밀려 들었다. 여자친구에게 너무 가혹한 도덕성을 요구했던 게 아닐까? 그의 여자친구는 결코 악인이 아니었다. 그냥 다른 사람들 만큼, 아니,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불법 다운로드 욕구를 자제하는 편이었다. 아마 그녀의 동정적인 마음씨가 탐욕의 브레이크가 되어준 거겠지. P2P를 이용한 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잘못은 불법 다운로드를 떳떳하게 여기고, 남의 지적 재산권을 업신 여기며, 복돌이 문화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왜곡된 세상에 있었다. 개인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 체제에 반항하지 않았다는 죄 외에는.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
GB때 복팩을 쓴 인간. 그리고 GB때 복팩을 쓰지 않은 인간.
첫 번째 인간은 정상인이다. 그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의지대로 움직인다. 세상이 복돌이가 되고자 하면 그들은 복돌이가 되고, 세상이 정돌이가 되고자 하면 그들은 정돌이가 된다.
그리고 GB때 복팩을 쓰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체제 반항자, 반동분자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결국 그들이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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