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
||
---|---|---|---|
작성일 | 2013-11-15 10:43:49 KST | 조회 | 248 |
제목 |
새벽의 불청객
|
오늘 새벽, 나는 갑작스러운 소음 때문에 강제로 수마의 손아귀에서 내팽개쳐졌다.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는 시계가 3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창문 밖으로 비치는 공허한 밤하늘을 노란색과 주황색 불빛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기억난다.
소리를 따라 어둠을 더듬거리며 나아가니, 나는 현관문에 도달할 수 있었다. 누군가가 거칠게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새벽의 부천은 불청객을 친절히 맞아들이기엔 너무나 위험한 곳이다.
"누구십니까?"
내가 문 너머의 불청객에게 물었다.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존 키츠입니다."
나는 문 너머의 남자가 미쳤거나, 아니면 길을 잘못 든 과거의 망령임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나는 뒷걸음질 쳤다. 그가 눈치챘던 걸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제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혼란스러우시겠지만, 제가 하는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걸 어떻게 믿소?"
내가 물었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문 밖으로 추위에 떠는 거친 호흡이 느껴졌다. 나는 새삼스럽게 이 미친불청객과 나 사이에 오직 문짝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리는 선율은 감미롭지만, 들리지 않는 선율은 더욱 감미롭다네."
그가 말했다. 나는 그 시구가 존 키츠의 시 <그리스의 항아리에 바치는 송가>의 한 부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의심은 더더욱 증폭되었다.
"형편없는 위장이군요. 만약 당신이 정말로 존 키츠라면, 키츠의 모국어인 영어로 시를 낭송했을 겁니다. 키츠는 낭만파 시인이었습니다. 그의 미학은 오로지 영어로 쓰였을 때 진정으로 빛을 발합니다."
"그게 바로 저의 비극입니다."
남자가 말했다. 그는 거의 흐느끼고 있었다.
"저는 키츠를 흠모하여 영국 땅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키츠의 생가를 방문하고, 그가 <물 위에 그 이름을 쓴> 묘비를 어루만지고, 그가 눈 감기 전에 방문했다는 이베리아 반도로 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한 집시를 만났습니다."
"집시라구요?"
"예, 선생님. 그 집시는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힘을 다루는 전문가였습니다. 그는 제가 정말로 갈구한다면, 저에게 키츠의 혼을 불어넣어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키츠의 재능을 흡수할 수 있다면 얼마나 황홀한 일이겠습니까? 저는 당연히, 그리고 반장난으로 집시에게 금품을 적선하고 키츠의 영혼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키츠가 된 겁니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선생님."
남자가 갑작스럽게 재채기를 하는 바람에 대화가 끊겼다. 이윽고 남자가 말을 이었다.
"제가 두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습니다. 한 육체에 두 자아가 공존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정신은 우리의 언어로써 주조된다는 것입니다. 키츠의 영혼을 받아들이자, 저는 산발적이고 모호한 악몽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게 꿈이었는지, 아니면 무의식중에 키츠의 예술혼과 광기가 발현되었던 건지도 구분이 잘 안갑니다. 저는 키츠가 사모했던 여인의 꿈, 가족의 꿈, 그리고 문학에 대한 불같은 열망에 사그라드는 악몽을 꾸었습니다. 모든 꿈이 이렇게 명확하고 '키츠적' 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쓸모없는 환상들이 훨씬 더 많이 보였습니다. 찰나의 순간마다 키츠의 뇌를 점령하곤 했던 자질구레한 생리적 욕망들, 의미 없는 이미지들..."
"당연히 그러겠죠.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평생을 영감 속에서 살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이 키츠의 자아를 받아들였다면, 그가 느끼고 경험했던 모든 걸 받아들이는 거죠. 그 중에는 예술적인 경험보다는 일상적이고 추한 경험들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지만 진정한 비극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불편쯤은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제가 바란 건 키츠가 그 찬란한 언어들을 내뱉는 순간을, 바로 코 앞에서 지켜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가 시를 쓰면서 느꼈던 황홀함을 같이 느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단 한 번도 시를 쓰지 못했습니다.
"어째서죠?"
"왜냐하면 제 정신은 이 나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정신의 장벽입니다. 키츠는 영어로 생각합니다. 그의 시 정신은 영어 문명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막대한 예술적 에너지를 제가 받아들일 때면 저는 한국인이 되는 겁니다. 그건 시를 번역해서 받아들이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번역자가 번역을 한다고 할지라도, 외국 시의 번역은 그저 짝사랑에 불과할 뿐입니다. 키츠의 영감이 제 손에서 발현될 때, 그 모든 아름다움과 기적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습니다."
"안타깝군요."
"선생님! 저는 이제 망령에 불과합니다. 제가 누구였는지도 제대로 자각할 수 없습니다. 제 정신이 키츠를 바라볼 때, 그리고 키츠의 정신이 저를 바라볼 때 우리는 거대한 인지의 간극을 느낍니다. 우리는 소통할 수도 없고, 서로의 재능을 서로에게 투과할 때마다 그 모든 감동이 걸러내집니다. 영감을 거세당한 예술가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습니다. 저는 키츠를 죽여버렸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위로?)을 건내야 할지 몰라 그저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갑자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폐가 되지 않는다면, 부디 선생님께서 무한한 자비를 베풀어 제 몸 속의 키츠를 데려가주실 수 있을까요?"
"뭐라구요?"
"부탁입니다! 선생님! 이대로라면 키츠와 저 둘 다 망령이 되어버릴 겁니다!"
"파렴치한 인간 같으니! 당신이 이 모든 불행을 자초한 겁니다. 당신은 위대한 예술가를 당신의 편협한 세계관 속에 가둬버렸소. 당신은 그 영혼을 감당해낼 수 있다고 자만했겠지만, 결국 실패했고, 합당한 벌을 받고 있는 거야. 이제 떠나시오! 가서 어둠 속을 계속 배회하시오! 그게 당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결말이니까."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남자는 더 이상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
||
|
|
||
|
|
||
|
|
||
|
© PlayXP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