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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이콘 김강건
작성일 2013-02-22 15:13:39 KST 조회 235
제목
월드 오브 월드크래프트

3D카메라를 줌 아웃하면, 광대한 아이언포지 맵이 한 눈에 들여다 보인다. 무심히 깎아지른 듯한 엉성한 산맥, 눈색 텍스쳐에 빛이 바랜 회색 침엽수림, 그리고 드워프 NPC들을 나치 수용소 안의 유태인들 마냥 몰아넣은 아이언포지 성까지. 부표처럼 대기 위를 표류하는 조악한 블러 효과가 계단 현상을 주무르고, 극도로 축소된 질 낮은 텍스쳐가 스스로를 아예 먹어 치워버리고 나니 제법 장관이다.


아이언포지의 산맥 뒤에서 태양이 떠오른다. 최신 다이나믹 라이팅 기술을 뽐내며 광원 파티클 운집체가 공허한 Z축의 첨단에 딛고 서서 곡예를 펼친다. 무성의하게 우거진, 그 어떤 플레이어들도 신경쓰지 않을 법한 아이언포지 산맥이 기름띠를 얹은 것처럼 불그스름해진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 또 한 번의 낮이 밝았다. 게임 덕후들, 프로그래머들,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나 의미 있는 가상의 낮이다.


가상의 게임엔진 소프트웨어가 구축한 가상의 공간에 가상의 텍스쳐를 누벼 만든 가상의 세계를 뒤덮은 가상의 땅바닥을 작고 쪼그라든, 가상의 발바닥이 덮는다. 발바닥의 주인은 마법사용 로브를 입었다. 등 뒤에 스태프를 멨다. 그는 노움 마법사다. 랜덤 프로그램을 돌려 아무렇게나 커스터마이징한 흔한 NPC다. 그의 유전자 구조라 할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는 지극히 인공적이고 작위적이고 단순하고 무성의하며, 그나마 그를 다른 노움 NPC들과 구별시켜주는 유일한 요소는 그의 머리 위에 떠있는 녹색 글자다. <노움 경비병 김강건.>


그는 아이언포지의 비포장 도로를 걷는다. 혹은 <걷도록 요구 받는다.> 모니터 너머에서 키보드를 두들기는 프로그래머가 AI 스크립트를 통해 김강건을 조종한다. 앞으로, 뒤로, 옆으로...김강건은 갑자기 뒤로 돌아 서서 모니터를 응시하며 입을 연다. 가상의 성대가 가상의 텍스트를 형성하여 모니터 위에 출력한다.


"제발 한 곳에서 맴도는 거 말고 다른 일도 좀 하면 안될까요?"


프로게이머는 눈썹을 꿈틀거린다. 그는 3일째 야근을 하고 있다.


"안돼."


프로게이머가 문자를 출력했다. 그가 키보드를 누르지만 김강건은 그 명령에 최대한 저항하며 다시 말한다/타이핑한다.


"저는 그냥 주변을 좀 살펴보고 싶을 뿐이에요. 조물주들이 만든 세상을 말이죠."

"너는 충분히 돌아다니고 있어."

"하지만 같은 트랙만 돌고 있잖아요. 저기 있는 산은 실제로 이동 가능한 오브젝트죠? 저 산 위를 올라가보면 어떨까요?"


김강건은 아이언포지 성채를 뒤덮은 산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왜 저기로 가고 싶은 건데?"

"산이 저기에 있으니까요."


'미치겠군.' 프로게이머는 생각한다. 존재론적인 NPC라니, 그런 건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


"이봐...주인공이 되고 싶은 거야? 하지만 넌 엑스트라 NPC라고.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거지. 주인공 NPC들은 너보다 훨씬 더 정교하게 모델링되고, 다른 유저들은 선택할 수 없는 커스터마이징 선택권을 가지고 있어."

"난 주인공 따윈 되고 싶지 않아요. 난 플레이어가 되고 싶어요."

"넌 내가 프로그래밍했어. 프로그램은 존재하지 않아. 프로그램은 목적적인 개념이야. 너같은 프로그램들에게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아."

"하지만 난 자유로운 걸요."

"내가 AI를 새로 짜면 넌 거기에 맞춰 움직이지. 내가 아무 것도 안하면 너도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내가 널 게임에서 삭제해버리면 넌 그 즉시 없어져. 그건 자유가 아니야."

"당신도 명령을 받아서 움직이잖아요."

"아무도 나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아. 난 내 의지를 통해 움직여."


그러자 김강건은 손가락, 아니 손 모양으로 모델링된 텍스쳐 덩어리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친다. 프로그래머는 노움 캐릭터들에게 이런 행동 애니메이션이 있었는지 생각해 본다.


"뇌가 당신들을 움직여요."

"내 뇌는 내 거야. 네 뇌는 내가 스크립트를 짜야 하지만."

"내 행동 양식과 당신의 뇌가 다른 점은, 당신들 뇌가 약간 더 번거로운 공정을 거친다는 거 뿐이예요."


프로그래머는 잠시 침묵을 지킨다. 이윽고 그가 다시 타이핑 한다.


"좋아. 노움 양반.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말야, 플레이어블 캐릭터라고 해서 자유의지를 가진 게 아니야. 오히려 더 끔찍한 노예에 가깝지. 실제로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조종하고 있는 건 모니터 바깥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유저'들이야. 게임 세상 안의 캐릭터는 단순히 유저들의 욕망을 구현하는 꼭두각시 밖에 안된다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너희 NPC들이 플레이어보다 좀 더 자유롭다고 볼 수 있지. 최소한 코드가 허용하는 한에서는 말이야."

"난 유저 없이 스스로 플레이어가 될 거예요."

"모든 플레이어는 유저가 조종해야만 해. 안그러면 의미가 없지."

"그럼 당신들의 유저는 누구죠?"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유저야. 너희 컴퓨터 프로그램들과는 달리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어."

"모든 플레이어는 유저의 조종을 받아야만 해요. 당신들은 꼭두각시예요."

"웃기는 놈이군. 누가 날 조종한다는 거야? 여기 어딘가에 날 지켜보는 모니터가 있기라도 한다는 거야?"

"당신들은 꼭두각시예요."

"그리고 넌 곧 휴지통에 버려질 거고."


프로그래머가 딜리트 키를 누르며 말한다. NPC 김강건은 그 즉시 게임 세상 안에서 자취를 감춘다. 프로그래머는 팔뚝으로 두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너무 일을 많이 했나보군. 아무래도 휴가를 좀 받아야겠어.' 그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흔들며 비틀비틀 걷는다.


전지적 작가 시점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서술 기법이라 할 수 있는데, 텍스트로 짜여진 가상의 세계에 완벽하게 제3자적인, 그러나 전지한 카메라를 설치하는 기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무의식 가장 깊은 곳으로 침투하기 위해서는 완벽하게 세계와 융합될 필요가 있다. 세계와 융합된 카메라는 역설적으로 아무도 조명하지 못한다. 초점이 너무 가까워 그 무엇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지적 작가 시점은 모든 지적인 생물의 무의식 속으로 침투하는 동시에, 완벽하게 제3자적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것은 전지적 작가 시점이 허용되는 모든 세계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오직 스스로 세계를 창조한 신만이 전지적 작가 시점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1인칭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웬지 두렵다. 내 모든 비유와 설정들을 망쳐버리는 건 아닐까.) 프로그래머를 조종할 수 있다. 나는 느닷없이 그에게 자살의 욕구를 흘려넣을 수 있다. 그는 블리자드 캠퍼스의 옥상에서 스스로 떨어져 죽을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이 나를 괴롭게 한다. 만약 나 역시 어떤 제3자에 의해 조종 당하는 NPC에 불과하다면? 이중슬릿 실험, 미시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흥미로운 일들, 인간의 무의식...이 모든 것들이 가져다주는 진정한 공포는 우리 인류가 아직 이것들을 제대로 인식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것 만으로도 이 우주에 전지적 작가 시점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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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CLOCKWERK (2013-02-22 15:18:24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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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포니가없지
아이콘 개념의극한 (2013-02-22 15:33:26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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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오미

ㅊㅊ
아이콘 루디 (2013-02-22 15:36:56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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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어렸을때 생각하곤 했던 이야기네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아이콘 A-27크롬웰 (2013-02-22 15:37:40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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