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벌써 몇 해 전의 일이지만, 나는 미스터리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의향을 출판 대리인에게 말해 본 적이 있었다. 예측한 대로 상대방은 어리둥절한 모양이었으나 곧 냉정해져서 나를 이렇게 훈계했다. 즉 '유명한 <펀치> 잡지의 유머 작가인 당신에게 우리나라가 요구하고 있는 것은 유머 소설뿐입니다'라고(덧붙여 말하지만, 뒤에 이 대리인은 편집인 및 출판인들로부터 잇달아 자기와 같은 의견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굽히지 않고 어떤 범죄의 세계를 다루어 보기로 결심한 결과, 이 책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2년 뒤에는 내가 동요집을 쓰고 있는 중이라 했더니, 대리인, 출판인 모두 이구동성으로 "오늘날의 영국 국민이 가장 일고 싶어 하는 것은 새로운 미스터리 소설입니다"라고 확신을 갖고 말하였다. 그로부터 또 2년이 지난 지금, 세상 사람들의 욕구는 다시금 변했다. 아동용 책이 널리 요망되고 있는 풍조인데도 감히 미스터리 소설을 쓰고 있다는 것은 악취미였다. 그래서 나는 《빨강집의 수수께끼》의 출판을 거듭함에 따라 이 머리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을 느꼈다.
나는 미스터리 소설을 굉장히 좋아한다. '맥주'집은 '맥주'라는 이름이 붙은 이상 나쁜 것이 있을 수 없겠지만, 역시 맥주의 종류에 따라 다소 우열이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와 같은 생각으로 많은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 왔다. 그렇다고 결코 내가 무비판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속속들이 캐어 보지 않고는 만족하지 않는 성격이므로 덮어놓고 무의미한 찬사를 보내지는 않는다. 우선 한 마디로 말하자면 미스터리 소설은 이해하기 쉬운 말로 씌어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언젠가 아주 흥미진진한 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을 읽은 일이 있는데, 범인이 어떻게 하여 피해자의 서재에 침입할 수 있었던 가하는 점에서 고찰해 볼 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작자는 다음과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탐정의 관심은 오히려 어떻게 해서 범인이 탈출 의도를 수행할 수 있었는가를 해명하는 데 있었다." 미스터리 소설의 살인범은 대부분이 아주 쉽게 도망쳐 버린다. 그런 사실이 나는 못마땅하다. 탐정이건 주인공이건, 혹은 용의자이건 등장인물들이 모두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횡설수설 지껄인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 살해당하는 흥분이나, 그릇 지목된 용의자가 느끼는 긴박감이 아무리 잘 씌어져 있을지라도 그런 것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언어의 범람이 허용되어도 좋다는 이유는 없다. 그렇게 느낌으로써 우리 독자의 기분도 구제된다.
연애라는 큰 문제에는 십인십색의 의견이 있지만, 미스터리 소설에는 연애가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머핀 빵 위에 묻은 흰 가루는 비소인지 혹은 그냥 가루인지 독자들을 안타깝게 하지만, 롤랜드가 안젤라의 손을 평소 습관보다 더 오래 잡고 있다는 식이면 분명 비위에 거슬리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발자국을 남겨 놓는다거나, 발견하게 한다거나, 혹은 담배꽁초를 주워서 봉투에 넣게 하는 좀 더 타당한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롤랜드에게 어떤 작품을 그의 완전한 독무대로 만들어 주고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는 것도 좋겠지만 미스터리 소설에 등장한 이상은 롤랜드도 역시 사건에 충실하도록 해야 한다.
다음에는 탐정인데, 우선 아마추어가 좋다. 실사회에서 으레 가장 우수한 탐정은 직업 경관이며, 가장 우수한 범인은 전문 범죄자이다. 그런데 일류급 미스터리 소설에서 악인은 아마추어로, 이를테면 우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피해자 객실에서 우리가 늘 만날 수 있는 사람이다. 신원 조사서도, 동업자 규약 색인도, 지문 대장도 적용할 수 없는 인물이다. 오로지 한 아마추어 탐정만이 차갑게 번뜩이는 귀납적 추리와 엄정한 증거들을 토대로 그 범인을 밝혀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실로 아마추어 탐정에게 꼭 필요한 덕목은 빛나는 추리력과 논리뿐이다. 과학 탐정이나 현미경을 들고 다니는 인간은 이만 꺼져 줬으면 한다. 명망 있는 선생에게 범인이 남기고 간 쓰레기를 뒤지게 하여, 살인범의 집이 양조장과 제분소 사이라는 판단이 나온들 무어 그리 대수일까? 또 실종된 인물의 손수건에 묻은 핏자국으로 그 사람이 최근에 낙타에게 물린 것을 증명한다 하더라도 얼마만큼 스릴이 있단 말인가? 적어도 나는 그런 것을 싫어한다. 지은이로서는 손쉬운 수법인 만큼, 독자가 볼 때는 유감스러운 일이다.
즉 결론으로는, 탐정은 일반 독자 이상의 특수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귀납적인 방법으로 엄정한 증거 사실에 입각한 논리적인 추리는, 독자들도 함께 범인을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다행히 우리들에게는 그런 능력이 주어졌다. 그렇게 써야 한다. 물론 시체 옆에 있던 탐정의 눈에 띤 어떤 것이, 서재에서 책으로 읽는 독자들에게도 똑같이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고 알릴 수는 없다.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의 코에 상처가 있고 탐정은 그것에 아무런 의미도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경우, 그러한 사실을 일부러 변명이라고 하면 오히려 독자들의 주의를 끌어 무의미한 코의 상처에 터무니없는 비중을 걸게 된다. 그러므로 지은이가 은근하면서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다른 인물들의 코에 관해서도 슬쩍 묘사해 둔다면 독자들도 놀라거나 화낼 필요가 없어진다. 독자들은 작자와 탐정이 현미경을 집에 놓아두고 와 주기만 하면 불평할 일이 없는 법이다.
과연 왓슨 역은 어떻게 할까? 나는 등장시키는 편이 낫다고 본다. 마지막 순간까지 해결책을 숨겨놓고는 그 기나긴 과정을 불과 5분이면 충분할 서막 취급할 작가라면, 그만 세상을 떠났으면 한다. 도대체 그렇게 막돼먹은 구성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탐정이 무엇을 생각하는 지 독자들은 낱낱이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왓슨을 탐정에게 붙이든가, 탐정으로 하여금 자문자답이라고 하게 하는 것이다. 왓슨을 등장시키는 방법이 실은 탐정의 자문자답과 다를 바 없는 형식이지만, 덕분에 훨씬 읽기 쉬워진다. 그러므로 왓슨 형식이 개가를 올릴 테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얼빠진 사람으로 묘사할 필요는 없다. 우리들처럼 얼마쯤 미욱하기는 하지만 친절하고 인간미가 넘치며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일수록 더욱 좋다.
《빨강집의 수수께끼》가 어떤 식으로 씌어졌는가는 이상의 설명으로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쓰고 싶으니까 쓴다는 것이 언제나 내가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실이다. 아무리 고상한 무운시(無韻詩)의 비극일지라도 남의 요청으로 쓰는 것은 떳떳하지 못할 일이며, 비록 전화번호부 한 권일지라도 애정을 작고 만드는 작업에는 자랑스럽게 종사할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을 끝내고 내가 왜 이런 미스터리 소설을 썼을까? 하고 후회한 적인 한두 번이 아니다 왜냐하면 미스터리 소설 애독자 중에는 더러 이 작품을 거의 이상적인 미스터리 소설로 보고 있는 듯 하기 때문이다. 어떤 분을 알고 있다. 면식은 없으나 잘 아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면 이 소설에서 어떤 말을 더하고 어디를 빼고 싶어 할 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의 갖가지 주문과 편견에 대해 나 역시 성의껏 최선을 다해왔다. ...그런데 이 책만큼은 이제 그가 영원히 읽을 수 없는 세상 밖으로 완전히 떠밀려났다는 생각에, 나는 등골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부끄러움을 금할 수 없다.
A.A. 밀른
-앨런 알렉산더 밀튼, 빨강집의 수수께끼, 이철범 옮김, 동서 미스터리 북스, 2003년, 11-15쪽.
마지막 문단 이야기는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라고...
참고로 이게 이 사람 유일의 장편 미스터리 소설
16년간 13판을 거듭하는 성공을 거두고 이 머리글을 썼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