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편집장 위베르 뵈브 메리:"혼자서 모든 책임을 지려고 했던 사람과 함께 이 논쟁을 땅에 묻고 있을 때 하늘도 축복하듯 비가 내리고 있었다. 상처가 그대로 있다면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상처를 대대적으로 수술해야 할 것이다." "프랑스인들이 이 묘지 옆에서 다시 시계추를 제대로 흔들리게 한다면, 프랑스인들은 자신들이 범한 과거와 현재의 과오를 정직하게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과오란 대게 양쪽 모두에게 책임이 있음을 인식해야 하고, 그럴 경우 힘을 합쳐 공동의 미래가 마주칠 곤경에 잘 대처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1951)
"우리는 단 하나의 국민입니다. 예기치 못한 일과 사건들이 어떠했던 간에 우리는 위대한 하나의 단일한 프랑스국민입니다. 제가 그것을 말하려고 했던 장소가 바로 비시입니다. 이제 과거는 끝났습니다. 비시 만세! 프랑스 만세! 공화국 만세!(드골, 1959년)
1971년 ADMP 기관지에 회장 라카이유 장군의 조사:"드골 장군의 죽음을 두고 프랑스와 전 세계는 생생한 애도를 표하고 있다. 사망을 계기로 그의 특별한 경력을 지니고자 한다. 장군은 1940년의 비참한 패배 후에도 조국이 투쟁을 계속하도록 이끌었고, 프랑스 자유군과 베강이 훈련시키고 처음에는 쥐앵이 나중에는 라트르가 지휘한 북아프리카군, 르클레르의 군, 비정규 국내군이 용감하게 싸우도록 이끌어 결국은 프랑스를 승자의 테이블에 앉게 한 인물이다."(1971년 1월)
장 카수(1953):"재판소는 판결 시늉만 내고 있었다. 분명한 토론을 모호하게 만들었고 한 번도 심도 있게 다루지 않았다. 페탱 소송도 마찬가지였다. 모라스 소송은 소송을 인식하지 않으려는 사람에게나, 인식할 필요가 있는 사람 모두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재판은 모라스가 그의 마지막 사설들 중의 하나에서 가까운 이웃을 고발한 것만 유죄로 인정했다. 그가 쓴 사설로 인해 고발된 모든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50년 동안 악시옹 프랑세즈 회원이었던 엄연한 사실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레지스탕스가 상속 요구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면, 심지어 정당들의 지원을 받아서라도 그것을 타도해야만 했다. 정당들이 권력에 집착하게 되었을 때 정당에 대항하다가 죽은 여왕(Reine morte)이 다시 한 번 권력을 취하는 호기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공화국이 드골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설득되었고, 또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레지스탕스 그것은 제4공화국의 저질 막간물로 실제 기억들을 사라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공화국 건설 신화는 역사의식으로 보면 충격적인 일이었고, 레지스탕스와 드골이 서로 다르다고 강요한 혐의를 받는 사람들에게는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효율적인 것이었다."Philippe Viannay, 1970년대에 기록했지만 출판하지 않은 논고
개1소리 하네
올ㅋ
등등
다양한 생각이 이리저리 교차하게 되는 옛날 살암들의 말말말
레지스탕스가 프랑스 정치에서 남용(?)되고 그 역풍을 맡게 되는 건 깨나 충격적이더근영...
드골 탓이 상당히 크긴 한데 뭐 드골이나 그 쪽 입장에선 어느 정도 상황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