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사사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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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01-04 22:51:21 KST | 조회 | 272 |
제목 |
역떡투척1:말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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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영국군 원정부대(BEF)에는 1개 기병사단이 포함되어있었다. 이 기병사단에는 당연히 만여 마리의 말이 포함되어있었다. 그런데 보병사단도 포, 수레를 끄는 말 뿐만 아니라 장교들을 태우기 위한 말까지 포함해서 거의 6천 마리 정도의 말을 필요로 했다. 8월에는 군급 전력에 2만 5천여 마리 말이 포함되어있었고, 최소한 12만 마리의 말이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문제는 영국이 이런 수요를 어떻게 따라잡느냐였다.
영국은 1차대전 이전 평시 군대에서 필요했던 말의 수가 워낙 적었기에 국가가 주도한 번식 계획이 없었다. 대신 매년 천여 마리의 말을 구입했왔을 뿐이었다. 영국은 1차 대전 이전 보어 전쟁으로 많은 것을 배우게 됬는데 말의 공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정상적인 상업 경로로는 말을 충분히 얻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했던 상황이었다. 1914년에 구매 장교들은 말을 강제로 구매할 수 있는(!) 사법 영장을 지니고 다녔다. 대부분은 지나치게 싸거나 비싸게 사지도 않고 적당한 가격(!)에 구매하려고 했다. 장교용 말은 70파운드가 기준선이었다. 물론 이런 조치로도 말을 충분히 구하긴 힘들었기에 위에 인용된 토드 헌터의 경우는 900마일을 여행해야했을 정도였다. 물론 모든 구매 장교들이 이렇게 빈틈없이 일한 것은 아니어서 아일랜드 장사꾼들에게서 구입한 말들 중 12%가 부적합 판정을 받아 바로 되팔리는 일도 있을 정도였다.
어떤 의미론 다분히 영국답게도 말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사례도 많았다. 웨이머스Weymouth사는 승합마차용 말을 너무 많이 보내 마차를 끌 말들이 거의 없는 수준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나 말들은 대부분 강매로 얻어진 것 또한 사실이었다. 특히 농가의 경우는 타격이 컸다. 보충대 하사관들이 티소에Tysoe의 버킹햄셔Buckinghamshire를 방문했을 때 '모든 농가들이... 충격과 비탄에 빠진 듯 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집에선 자식들의 입대하는 것은 자랑스럽게 생각했지만 말까지 잃는 것은 견디지 못할 정도였다.
웃지 못할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랭카셔의 세 어린이는 당나귀 그림과 함께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친애하는 키치너 경, 저희 집 말 중 두 마리는 이미 죽었고 세 마리는 해군에서 일하고 있어요. 저와 제 엄마는 경을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지만 제발제발제발 우리 늙은 베티만은 남겨두게 해주세요.'
이렇게 구매된 말들은 장교들이 말을 고르는 remount depot으로 보내졌다.
'커리Curragh(Dublin시 부근의 평야) 경마장의 거대한 마구간은 전국에서 징발된 끝내주는 말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아일랜드, 말들과 녹지로 잊지 못할 그 광경이여. 젊은 우리 장교들은 말을 고르는 데 엄청난 재미를 느꼈고 말을 보는 눈이 있는 사람에겐 더더욱 그랬다.'
-왕실 공병대 제임스 페니킥James Pennycuik
1915년 6월, 병사가 징집되기도 전에 군대는 전국에서 중(重)마를 8%, 승용마를 25%를 징발했다. 1917년에 군대 전체에서 동물의 수가 100만 마리에 달했고, 그 중 43만 6천여 마리가 프랑스에 배치되어있었다. 가축 사료가 탄약을 근소하게 제치고 프랑스로 운송된 단일 품목 중 가장 무거운 품목이었을 정도였다. 이런 보급의 부담으로 인해 여성들을 가로막던 장벽 또한 사라졌다. 1918년에 6000여 명에 달하는 Women's Forage Corps 소속 여성들이 건초 운반을 담당하고 있었고 Women's Remount Depot은 새로 징발된 말들을 관리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물론 여자들이 이런 중노동에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는 반발도 당연히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여성들은 일을 훌륭히 해냈다.
이런 보급의 부담은 기병 때문만은 아니었다. 1917년 프랑스에 남은 기병대에는 2만 7천여 마리의 말들이 있었고, 이는 1918년 초에 만 6천여 마리까지 떨어진다. 대부분의 말들은 프랑스군, 독일군, 미국군에서 그랬던 것처럼 포와 수레를 끌고 있었다.1918년 12월 영국군 원정부대는 394,443마리의 동물을 운용했다. 이 중 25,414 마리가 기병 군단에 속해 있었고 48,822 마리가 연락용이었다. 비단 말 뿐만 아니라 차량 또한 그 수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1914년 육군 병참대에선 507대의 차량을 운용했지만 1918년 1월에 이르러서는 2만 2천여대의 트럭이 프랑스에서 운용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일반 보병들에게 '운송수단'이란 두 말의 말이 끄는 수레였다.
물론 말을 관리하는 것은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행군이 끝난 후에도 말을 관리해야하는 병사는 두 시간은 넘게 계속 서 있어야했다. 물론 말은 스스로 씻거나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병사들은 밤에도 행여 무슨 난리를 필까 제대로 자지도 못 했다. 이렇게 병사들을 피곤하게 만드는 말이었지만 병사들은 말들을 굉장히 좋아했고, 만약 죽기라도 한다면 자신의 전우가 죽은 것마냥 시를 지어 애도하기도 했다. 3차 이프르 전투가 한창일 때 '코, 눈과 광대뼈, 위턱을 한 쪽씩 잃은' 젊은 캐나다 병사는 자신의 처참한 부상에도 불구하고 포탄에 함께 당한 말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함께 왔을 정도였다.
그 병사는 이렇게 말했다.
'이 녀석 앞다리가 완전 뭉개져서 냅두고 올 수가 없었습니다. 캐나다에서부터 줄곧 함께였는걸요.'
블로그에서 복붙복붙
아 제 블로그입니당;
처음 쓸 때는 야심차게 썼는데
지금 보면 많이 조잡함
하긴 내가 아는게 없으니 조잡하징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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