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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12-18 21:21:56 KST | 조회 | 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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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도정치 논해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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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진 통일 이후 분서갱유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전한 시대에 들어 정치적 이념으로 자리잡게 된 이유는
사회, 도덕적 윤리를 강조하여 수직적 신분 질서를 정당화 시키는 의도에 있었다. 이러한 유교는 중앙 집권 강화와 사회구조 안정에 큰 도움이 되었고, 율령제와 맞물려 주변 국가에 전파되게 되었다.
유교에서 강조하는 仁愛, 忠孝, 政治는 모든 덕과 혈연관계에서의 관계로 부터 나아가 타인에 이르기 까지 다스려야 할 덕목으로 보았으며, 이에 따라 각 계급에 따른 도리를 다하여야 한다는 正名사상이 대두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왕은 형벌에 따른 가혹한 통치(法治)보다는 도덕적 교화에 따른 정치(德治)를 하여야 하며, 왕은 하늘의 뜻을 대변하는 자로써 백성을 살기 좋게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왕도 정치라 함은 유교 오경 중 하나인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에 나오는 구절인 無偏無黨 王道蕩蕩 無黨無偏 王道平平 無反無則 王道正直 (치우침이 없고 공정하면 왕도가 광대하고, 공정하고 치우침이 없으면 왕도가 평이하며, 뒤집힘이 없고 기욺이 없으면 왕도가 정직하다)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왕은 天命을 대변하는 자로써 도리에 따라 백성을 잘 다스려 태평성대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유학자들은 각기 다른 이론을 주장하였다. 맹자는 覇로써 仁을 가장하지 않고, 仁에 따른 통치로써 恒心을 가지고, 현실에 맞는 정치를 할 것을 논하였고, 순자는 성악설에 따라 인간은 악하기 때문에 仁에 따른 정치 뿐만이 아니라 覇를 통한 가혹한 형벌도 필요하다 보는 王覇幷用論을 주장하였다.
원대에 변형된 성리학을 받아들인 조선은 이에 따라 왕도정치의 중요성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조선 초기에는 왕권과 신권과의 균형을 조절하려는 움직임이 종종 보이게 된다. 태종 대에는 왕권 강화를 위해 6조의 엄무를 왕이 직접 승인하는 육조 직계제가 이루어졌으며,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의정부의 권한을 인정하는 의정부 서사제로 되돌리는데, 이는 태종의 노력으로 강화된 왕권을 통해 왕을 중심으로한 왕도 정치가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으며, 조선 건국 이후 꾸준히 발달한 유교적 학문 역량이 눈에 띄게 성장하였으며, 왕과 신하의 균형적인 정치 형태는 유교적 정치 이상에 걸맞는 정치 형태이기 때문이었다. 세종 개인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관심을 통해 과학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으며, 훈민정음 창제에 따라 삼강오륜의 근본을 담은 삼강행실도, 국조오례의 등을 편찬하여 지역 사회 질서를 바로 잡는데 힘썼다.
이러한 왕도정치는 백성을 근본으로 보는 민본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론이며, 유교 정치의 이상적인 정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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