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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이콘 푸에르토_리코
작성일 2011-10-03 16:26:43 KST 조회 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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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개천절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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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윗사진은 이병도 슨상님께서 개천절의 유래가 최근 대종교경전에서 유래한다 하신 것이고

일단 대부분의 글에서 개천절을 처음 만들고 기념한 게 1909년 대종교에서였다는 것, 그리고 그 상징성을 왜정때 임정과 해방후 한국정부가 중히 받아들여 인정했다고 씁니다. 즉 위에 말씀과 대동소이하다는 거죠.

그럼 10월 3일은 누가 정했나? 하여 궁금해져서 찾아봤음다. 능력이 후달려서 논문 몇 개밖에 못 찾았는데, 그 중 일부를 밑에 긁어와봤음.(이거 불펌하면 좆되나?) 일단 긁어온 소스는 정영훈, 「개천절, 그 ‘만들어진 전통’의 유래와 추이 그리고 배경」,『고조선단군학 제 23호』, 고조선단군학회, 2011, pp. 407~411

일단 논문이 40페이지 정도 돼서 다 긁어오긴 어려운데, 대략 홉스봄의 "만들어진 전통"이나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따위 논리로 탈민족주의 주장을 전개하는 걸 비판(?)하고 있어요. 비록 개천절 같은 민족전통들이 근대의 발명품이라 할지라도 과거에 그 기반이 되는 소스들이 있었으며, 근현대 민족통합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면 그걸 비판할 수는 없지 않냐는 요지임다. 뭐 이건 사람들 가치관 따라 알아서 판단할 문제고...

여튼 저는 여기서 대종교의 개천절 같은 단군신앙의 논리가 왜놈들의 근대 국가신토처럼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는 일종의 고유종교 비슷한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해서 종교 드립을 쳤던 거임다. 물론 대종교와 신토 교단의 양상은 천지차이니 맞바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정도나 수준의 차이일 뿐 기본적인 관계는 비슷하지 않냐는 건데... 뭐 단군의 역사성을 중시하는 관점도 있고 하니, 이것도 결국 근대 민족주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판단할 문제 아닐까 싶으요. 긁어온 논문 내용 중에도 과거 단군을 역사적으로 인식하는 여러 가지 양상들이 보이고 있고.

개드립용으로 썼던 글이 이렇게 되다니

개천절, 그 ‘만들어진 전통’의 유래와 추이 그리고 배경 407

우선 10월3일이라는 날짜에 대해서부터 살피면, 이 날짜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지 하는 것은 불확실하다는 말부터 먼저 해야 할 것
이다. 단군의 건국을 전하는 最古의 문헌들인 삼국유사 나 제왕운
기 는 물론이고 단군의 건국을 언급하는 조선조의 사서들에서도 10
월3일이라는 날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왕조 이래의 (또는
그 이전부터의) 단군관련 제례나 민간신앙 속에 그같은 전승이 있었
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우선, 조선초기 이래로 평양의 단군묘와 단군사, 구월산의 삼성사,
그리고 강화도의 마니산(참성단) 등에서 행해진 국가차원의 제례나
풍습에 대해 언급하는 문헌기록들이 그 제사시기를 봄・가을이라 언
급하고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가령, 세종7년에 정척이 왕에
게 단군을 치제하는 독립된 사당을 지을 것을 건의하는 상소문 속에
는, 그동안에는 檀君廟를 기자묘에 부설하여 봄・가을에 제사지내 왔
다는 내용이 보이며,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사속에도 세종11년에
따로 檀君祠를 설치하여 봄・가을마다 치제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성종실록 에는 예조가 왕에게 구월산 三聖祠에도 평양의 단군묘의
예에 따라 봄・가을로 제사지낼 것을 건의하였는데, 왕이 그대로 따랐
다는 기록이 나온다.5)
그런데 문헌에는 이 봄가을 제사전통이 ‘舊例’에 따른 것이라거나
고려시대부터의 예에 의거한 것이라는 기록도 보인다. 가령 세종실
록 지리지의 강화도호부조 마리산 항에는, 산꼭대기에 조선단군이
---
5) 세종실록 권29, 세종 7년 9월 辛酉 ; 세종실록 지리지 권162, 평양부 ;
성종실록 권15, 성종 3년 2월 壬申.


408 단군학연구 제23호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참성단이 있고 산기슭에 재궁이 있는데, 구례
에는 매년 봄・가을에 조정에서 代言을 보내어 초제를 지냈고, 세종12
년에는 2품이상 관리를 보냈다는 내용이 나온다.6) 그리고 이형상이
쓴 江都志(1696) 祠壇 참성단항에도, 조선에 들어와서도 옛날 고려
가 하던 대로 참성단에서 봄과 가을에 소격서의 주관하에 초제를 지
냈다는 내용이 나온다.7)
그런데 여기서 제사시기로 언급한 봄・가을은 뒷날 단군신앙 관련
제례일로 지켜진 3월15일(어천절, 단군이 승천한 날)과 10월3일(개천
절, 단군이 강림한 날)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그같은 제례
가 고려시대의 옛 관례에 따랐다고 언급한 것을 보면, 그같은 전승은
조선조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국가가 시행하던 단군관련 제례의 내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자세
한 기록을 찾을 수 없지만, 민간의 신앙에 대해 전하는 문헌에서는
10월3일이라는 구체적인 날짜가 적시되기도 하였다. 우선 19세기의
문헌인 무당내력 에는 “상원갑자 10월3일에 神人 단군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교를 세우고(設神敎) 백성을 가르쳤다”는 얘기와, 단군이
매년 10월마다 백성들로 하여금 그 근본을 잊지않게 하기 위해 무녀
를 시켜 치성들이게 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8) 이 책은 무당과 무속
---
6) 摩利山 在府南 山頂有塹星壇 ... 世傳朝鮮檀君祭天石壇 山麓有齋宮 舊例每春
秋 遣代言設醮 今上十二年庚戌 始遣二品以上. ( 세종실록  지리지 권148, 강
화도호부)
7) 塹城壇 在摩尼山山頂 世傳檀君祭天處 我朝仍高麗之舊 醮星于此 ... 春秋行祭
時 昭格署官員 前期四十日下來 釀酒以素饌行之. 국역 甁窩集 3, 한국정신
문화연구원, 1990, 274쪽.
8) 서울대규장각 편, 무당내력  영인본, 1996, 41.49쪽. 서문에 上元甲子(唐堯
時) 十月三日 神人降于太白山 (白頭山 或云 妙香山) 檀木下 是爲檀君 乃設神
敎而敎之 長子扶婁 賢而多福 故人民尊信 後日擇地等壇 土器盛禾穀 編草掩之
曰扶婁檀地(業主嘉利) 每歲十月 新穀旣登 以甑餠酒果 致誠祈禱라는 내용이
있으며, [成造巨里]를 설명하는 부분에 檀君時 每歲十月 使巫女 祝成造家之


개천절, 그 ‘만들어진 전통’의 유래와 추이 그리고 배경 409

의 연원을 단군으로까지 소급하여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민
간신앙 속에 10월3일에 대한 전승이 있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 동학
운동(1894) 무렵에 평안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김염백의 단군신교 교
단도 10월3일과 3월15일을 단군의 탄생일과 仙去日로 정하여 제례를
개최한 것으로 알려지는데, 이점 역시 단군관련 민간신앙 속에 10월3
일에 대한 전승이 있었음을 확인시켜준다.9)
1904년에 백두산지역에서 활동하던 白峯 중심의 단군교단에서 발
표한 [단군교포명서]에서도 10월3일을 ‘檀君開極立道之慶節’, 곧 단
군이 나라(極)를 열고 가르침(道)을 세운 경축일로 거론하고 있다. [단
군교포명서]는 나철이 백봉측으로부터 단군교 보급을 권유받으면서
받은 경전류 중의 하나로서, [포명서]에 의하면 1904년 10월3일에 백
두산에서 白峯神師를 중심으로 하여 민족고유종교인 단군교가 포명
되었다 한다.10) [포명서]에서는 단군교의 역사와 의의를 말하면서 고
유종교인 단군교가 활성화되어야만 민족의 번영이 가능하다는 요지
---
意人民不忘其本 致誠時依例擧行耳라는 내용이 있다. 무당내력 에서는 무속
제례의 유래와 내용을 그림을 곁들여 설명하고 있는데, 특히 무당(무속)이 단
군시대에 단군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 10월에 개최되어온 고
대이래의 제천행사들을 단군의 탄강을 기념하기 위해 단군이래 개최되어온
행사로 서술하기도 하였다. 이 무당내력 은 乙酉仲春에 簡谷이라는 호를 가
진 이가 쓴 것으로 나오는데, 학계에서는 이 을유년을 1825년이나 1885년으
로 추정하고 있다.
9) 김염백의 단군교단에 대해서는 이강오, 「단군신앙총론」, 전북대학교논문집  
제10집, 30-32쪽 ; 村山智順 저(1935), 최길성역, 조선의 유사종교 , 계명대출
판부, 1991, 354쪽 참조. 村山의 책에서는 1893년경 김염백에게 신교를 배운
한명윤이라는 사람이 1899년부터 포교를 시작한 사례를 소개하는 가운데 10
월3일과 3월15일에 교도를 모아 예배를 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다.
10) [포명서]에서는 그 발표일을 ‘檀君開極立道 四千二百三十七年 卽大韓光武八
年 甲辰 十月初三日’로 적고있다. 4237년은 단기 1904년에 해당하며, 포명서
에 의하면 통상 단군의 개국년도로 알려진 서기전 2333년을 단군의 開極立道
한 해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開極의 의미를 개국이 아닌 단군의 탄강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410 단군학연구 제23호

의 주장을 전개하는데, 나철은 이 백봉의 단군교로부터 포교를 촉탁
받아 1909년 초부터 본격적인 종교활동을 시작하였고 다음해에 대종
교로 교명을 바꾼다.
한말에 개천절이 처음 제안될 때도 그 날짜에 대한 약간의 논란이
있었던 듯 하다. 그러나 건국시조의 건국과 민족사의 출발을 기념하
는 행사의 필요성이 더 긴요한 데다, 또 일반이 개인적 조상들에 대
해 제사할 때도 후손에게 편리하고 의미있는 날자를 정하여 時祭를
지내는 전통도 있기에,11) 정확한 날짜에 대한 시비는 더 진행되지 않
고 일단 제안된 10월3일이 큰 반대없이 수용되게 된다. 그리고 1949
년에 정식으로 국경일이 될 때는 10월3일은 그대로 둔 채, 종래의 음
력을 양력으로만 바꾸게 된다.
개천절의 날짜나 시기와 관련하여 하나 더 언급할 것은 고대의 제
천전통 및 추수감사절 류의 민속과의 관련성이다. 개천절의 유래는
흔히 삼한과 부여・고구려・예맥 등 고대국가의 제천축제나 근대까지
남아있는 제천민속과의 관련속에 설명되어 왔다. 일부 논설들은 단
군 국조에 대한 제사라는 측면과 제천문화를 결합시켜서 고대에 거
행된 제천행사의 제사대상이 단군(天帝)이고, 그 유습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는 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특히 최남선이나 정인보・안재
홍・조소앙 같은 국학자들은 그같은 방향에서 개천절의 유래를 설명
하였고, 대종교측에서도 같은 논리를 보인다.12) 주장자들의 논리를
따르면 10월3일의 날짜가 고대의 제천전통이나 천제풍습과도 연관이
---
11) <황성신문> 1909년 11월21일자 신문에 수록된 [檀君聖祖祭日] 제하 논설에서
그 같은 정황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의 [각주20]을 참고할 것.
12) 그러나 [단군교포명서]에서는 고대의 제천전통을 언급하지 않았다. 또 위에서
말한 <황성신문> 1909년 11월21일자 [檀君聖祖祭日] 제하 논설에서도 개천
절(개극절)의 당위성을 공동조상이자 개국시조인 단군에 대한 보답과 추모라
는 차원에서 주로 설명하고 있다.


개천절, 그 ‘만들어진 전통’의 유래와 추이 그리고 배경 411

있을 수 있다. 개천절을 추수감사절 제천민속과 연결짓는 설명방식
은 왜 추수철인 10월3일인지를 해명해주면서 개천절의 역사성을 보
강시켜주고 있다. 10월3일 기념일을 지칭한 명칭이 다양한 가운데 최
종적으로 개천절이라는 명칭이 선택된 데는, 개천절을 고대이래의
제천문화와 연관짓는 생각이 작용하였을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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