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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이콘 Celeste
작성일 2011-04-10 19:25:04 KST 조회 84
제목
읽어볼만한 글인 것 같습니다.

“ ” 어떤 잉여적 존재들의 모호한 이름에 대한 고찰


어느 비석 앞에서 귤을 까다보니 탱자라서 열 받았다.

      아, 여긴 회수 건너편이었지. 불현듯 스치는 깨달음




글_ 황대훈

황대훈_ 휴가 나가고 싶네요. 현역으로서 마땅히 군인들의 낙을 앗아간

신종플루에 대한 불만을 토해내야겠지만... 뭐 언젠간 집에 가겠죠...




내가 요새 오덕질을 하는데, 느낀 게...


일본에서 수입한 오타쿠라는 단어는 약간 모호합니다. 즉, 전문가라는 긍정적인 이미지와 정신병자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 사이에는 어떤 메울 수 없는 간극이 분명 존재하고 있고, 그래서 실제로 이 단어가 쓰일 때는 필요에 따라 한 가지 성격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그 때 그 때 모호함을 제거해왔죠. 말하자면 “와, 세상에 너는 그런 것도 알고 있어? 대단하다.”가 “그래봤자 넌 부적응 찌질이 병신 ㅋㅋㅋ”와 아무런 모순 없이 양립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실 일본에서조차 오타쿠라는 집단의 속성을 쉽게 정의하기 어려워하는데 비해, 한국에서는 솔까말 “개나 소나” 갖다 붙이면 그냥 오타쿠가 돼버리죠. 애초부터 한국에서는 부정적인 의미로서의 오타쿠가 강조되어 왔기 때문에 대중문화와 관련된 모든 부정적인 함의를 오타쿠란 단어가 뒤집어 쓰게 되고 말았습니다. 나중에는 애니메이션만 한 편 봐도 오타쿠고, 만화책 한 권 사보면 오타쿠가 되고...심하면 하여튼 그냥 찌질하면 다 오타쿠, 오타쿠면 다 찌질하고 병신임 ㅋㅋㅋ, 이런 지경까지 옵니다. 오타쿠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던 긍정적인 의미, 혹은 개인의 취향으로서 존중되야 하는 어떤 최소한의 영역이 완전히 거세되고 만 것입니다. 이제 오타쿠라는 단어에는 그냥 병신 같다는 이미지만 남았죠. 병신 같은 게 본래 세상에 한 둘이 아닌지라, 본래 모호한 단어인데 대상이 더 애매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폐인이든, 잉여든, 찌질이든, 병신이든 유사한 단어랑 얼마든지 변용되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이게 아무렇지도 않은 현상 같지만 사실 대중문화, 특히 오타쿠들의 영역으로 잘 알려진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등등에 취미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꽤나 불편한 현상입니다. 자신의 취미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짜증나게도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데 추가적인 비용이 필요한 진입장벽이 생기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오타쿠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아주 옳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신경을 안 쓰기가 어렵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대중문화의 영역을 갉아먹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죠. 이 오타쿠 담론의 더 황당하고 짜증나는 문제는, ““자기도 자기가 오타쿠인지가 모호하기 때문에”” 반박도 변호도 쉽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대체 누가 오타쿠인 겁니까? 지금처럼 광범위한 정의 속에서는 누구나 오타쿠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나만은 결코 오타쿠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협의적 차원에서 비난이 이루어지는 개별적인 사례 속에서 오타쿠란 광의에 포함될 수 있는 개인들은 결코 단합해서 저항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효과적인 반박도 이루어지지 않죠. 보통은 난 쟤들이랑 달라, 하고 이탈하거나 오히려 그래 너희야말로 개씹덕 병신들이다 죽어라, 하고 적대시하기 까지 합니다. 뒤에서 계속 다루겠지만 이 같은 단어의 모호한 정의와 사용자의 무신경함에서 나오는 이탈과 내부에 대한 적대시는 우리 대중문화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주요 원인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오타쿠란 단어는 모호한 정의 때문에 더 이상 논의를 진행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죠. 따라서 앞으로 논의에서 다룰 그 애매모호한 집단을 그냥 ““ ””로 명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존나 핡핡대지 않으면 안 살 것 같애.


그렇다면 한국의 이 애매모호한 ““ ””들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우선 그들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의 오타쿠 집단의 상황을 보고 생각해보면 좋은 비교가 될 것 같습니다. 연세대에서 일문예 수업을 진행하는 신하경 씨는 오타쿠를 80년대 등장한 새로운 문화소비주체로 정의하면서 그 영향력을 재조명한 바 있습니다. 그 때 이용했던 접근 방법이 주로 문화물들이 소비되고 담론화되는 과정을 통해 해당 국가의 문화를 분석하는 방식이었는데, 여기서도 유사한 방식을 활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타쿠들의 삶을 일상의 시선으로 관찰한 [현시연] 이라는 만화는 어떨까요? 모 대학 동아리 ““현대 시각문화 연구회””(라고 쓰고 오덕들이라고 읽는)와 신입생의 만남,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해와 갈등, 그리고 이해를 다루는 이 작품은 일반인의 시선에서 바라본 당혹스런 오타쿠들의 일상을 나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일반인들에게 막연하게 상상 속으로만 존재하는 마이너리티들의 모습은 왜곡되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주류가 될 수 없는 모든 존재들의 비극이기도 한데, 지나가는 기사나 소문 속에 왜곡되고 부각된 몇몇 이미지만으로 오타쿠들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히기 쉽다는 것이죠. 하지만 [현시연]처럼 일상을 비추는 작품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인식은 많이 바뀝니다. 마치 북한 사람들이 실제로 만나보면 사람 잡아먹는 괴물이 아니라 그냥 보통 사람인 것처럼, 오타쿠들도 그냥 대학 다니고, 수업 듣고, 배고프면 밥 먹고, 사랑도 하고 싸움도 하는, 그냥 보통 사람들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현시연] 내에 그려진 캐릭터들은 만화적으로 윤색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현실””에 존재하는 오타쿠들에 대한 또 다른 환상을 준다는 우려(특히 코사카 같은 경우가 그렇죠)도 있을 법합니다. 하지만 편견 속에 쉽게 지나치는 ““평범성””의 발견은 한 사회가 한 집단을 인식하는데 있어 결코 가볍지 않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저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 라는 인식이 가능해지죠. 필연적으로 오타쿠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회의 관용도 넓어집니다.


애니, 만화를 살펴봤으니 이번엔 라이트 노벨 쪽도 봅시다.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라는 엄청난 제목을 달고 출간된 라이트 노벨은 우수한 성적에 수려한 외모, 문무를 겸비한 재능에 모델 활동까지 하는 완벽한 여동생이 알고 보니 오타쿠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오빠가 처음에는 경악하지만, 모든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취미 생활을 철저히 감추며 생활해야 하는 여동생의 고충을 알게 된 이후 그녀의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힘을 합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겉으로는 이런 사람이 오타쿠라고? 싶을 만큼 뛰어난 스펙을 지닌 여동생 캐릭터는 정말 ‘그럴 듯’ 해 보이는 [현시연]의 오타쿠들과는 다른 인식의 경지를 선사합니다. 말하자면 ““이런 사람은 오타쿠 하면 안되는 걸까?”” 하는 고민이지요. 이 작품은 오타쿠들이 역으로 주류를 형성하는 [현시연]의 작품세계와는 전혀 다른 출발점에 서 있습니다. 그곳에서 오타쿠는 완벽한 비주류입니다. 여동생 또한 그 환경이 자신을 위해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않으며, 철저히 자신의 취미를 남들에게 숨기고, 가족에게조차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합니다. 의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은폐하는 이 같은 방식은 마치 현실에서 동성애1자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취하는 방식과 아주 닮아 있는데, 소설은 이 구도를 빌려 오타쿠를 둘러싼 사회가 비주류를 대하는 잔인한 태도를 고발합니다. 실제로 여동생이 오타쿠라는 사실을 알게 된 가족들은 불 같이 화를 내며 그 동안 구입한 책과 게임들을 전부 버리라고 종용하기도 하고, 배신감을 느낀 학교 친구는 절교를 선언하기도 합니다. 가족과 친구도 중요하지만 취미 생활도 포기할 수 없는 여동생은, 끝까지 분열하는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한 때 [번지점프를 하다]는 영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기존의 불륜 영화는 마지막에 불륜 여성이 회개를 하거나 응징을 받는 식으로 기존 사회의 의도가 관철되면서 끝나는데 반해, [번지]는 마지막에 주인공들이 현실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의도를 지킨다는 결말 때문이었는데요.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도 [번지]처럼 변화한 사회의 인식을 반영해주는 것 같습니다. (예술이 현실을 반영하는 건지, 아니면 현실이 예술을 통해 재인식되는 건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요) 혹은, 이런 소설들이 출간되면서 조금씩 스스로의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거겠죠.


이외에도 이미 상업적으로, 사회적으로 충분한 영역이 마련된 오타쿠들을 다룬 작품들은 훨씬 많이 있지만, 대체로 이 같은 경향에서 본토의 분위기를 조금이나마 읽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본에서 오타쿠들은 주체로서, 혹은 소재로써, 때로는 메시지의 대상으로서 ‘자신들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대중문화 영역에서 폭넓게 활약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충분히 이야기되고 있고, 명확하게 인식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오해나 불합리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는 여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여지’는 바로 사회적 관용 속에서 가능한 것이며, 그 관용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오타쿠들 스스로 마련해낸 부분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소비자로서의 오타쿠와 그 대변자로서의 문화상품이 서로 선순환을 이뤄낸 결과지요. 대중문화의 큰 손인 오타쿠들의 소비생활이 위축되지 않고 진행될 수 있다는 것은 대중문화 산업의 관점에서도 엄청난 플러스 요인입니다. 오타쿠를 축으로 형성되는 순환 고리는 사회의 압박 속에 사그라들지 않고, 사회의 관용에 스며들어 더 크게 외연을 확장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야말로 대한민국의 ““ ””들이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영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데, 우린 아무도 안 사잖아?


일본의 오타쿠들 이야기를 했으니 이젠 한국의 ““ ””들의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이쯤에서 좀 뜬금없이 시장의 문제로 들어가 봅시다. 한국 대중문화 산업의 시장 말입니다. 일본의 오타쿠-대중문화 사이에 존재하는 순환 고리처럼 작동하는 흐름을 한국에서 찾으려고 했다간 금방 좌절하고 말 것입니다. 아무리 한국과 일본이 애초에 소비시장 규모가 다르다고는 해도, 이만큼씩이나 차이가 난단 말인가. 딱 잘라 말해 한국의 대중문화는 소비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향유’에 그치고 맙니다. 


게임시장. 망했습니다. 권력은 온라인으로 넘어간 지 오래입니다. 물 건너에서도 패키지 시장은 날로 축소되는 추세라고는 하지만, 한국의 게임시장은 시장 파괴에 철저히 자발적이었던 게이머들의 손에 의해 주도적으로 해체되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불법복제와 불법다운로드가 그 주범이었죠. 발 빠른 업데이트가 가능한 온라인 게임은 오늘날의 게이머들의 감각을 만족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지만, 온라인 게임의 성공이 ““ ””들의 사회적 여건 변화에 도움을 준 건 거의 없어 보입니다. 적어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실 속의 게이머들에게 구체적인 위상 변화를 일궈낸 사례는 스타크래프트의 E-스포츠화가 거의 유일합니다. 이제 게임시장에 존재할 수 있는 선순환의 고리는 완전히 사멸되었고,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부활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한국 게임시장에 아직은 시장 같은 면모가 남아 있을 적에 망해 가는 시장의 흐름을 되돌리려고 애쓴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게임 잡지도 있고, 각종 게임개발사들도 당연히 있었고, 온라인 공간에서 복제와 다운을 성토하는 목소리도 없진 않았죠. 지금도 그 때의 전통이 유명 게임포털에는 꽤 남아 있어서 복사나 다운 관련 내용을 게시하는 걸 자체적으로 금지하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시장을 구하진 못했죠. 아니, 솔직히 그 위악적인 인터넷 공간에서 문화물을 사서 즐기자는 목소리는 심지어 한번도 다수였던 적조차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비단 게임시장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이미 상품에 정당한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어진 왜곡된 상황에서 시장의 성패는 상품의 질이 아닌 시장을 보호하려는 자와 시장을 파괴하려는 자의 소비를 통한 대리전에 달려 있었습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패키지게임이 소멸하고, 출판업계가 지지부진하며, 음반시장도 크게 축소된 지금의 상황은 결국 시장파괴세력이 대세를 자신들의 쪽으로 가져가는데 성공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역으로 말하자면 이는 마땅히 시장을 보호해야 할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시장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뜻도 됩니다. 다시 또 결국, 대체 누구에게 시장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었던 것일까요? 그건 조금이라도 시장에 나온 상품을 향유했던 모든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런데 왜 한국 문화산업시장에서는 그것이 ““어떤 특수한 사람들만의 책임””인 것처럼 비쳐졌던 것일까요? 정말로 시장에 참여했던 사람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한국 사람들은 전부 스타만 하기 때문에? 만화는 전부 일본 만화만 봐서? 음악은 팝송만 들으니까? 정말 그랬나요? 아무도 시장의 패망에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고, ““사실 시장이야 망하건 말건 나완 관계없어””라고 말하고 있는 지금의 현상은, 앞서 말했던 이탈과 내부적대시라는 개념 없이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우린 안 될 거야, 아마.


한국 대중문화산업이 일본의 경우처럼 시장과 참여자의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지금도 충분히 시장의 외연 확장과 더불어 시장 참여자의 사회적 위상에 대해서도 재고될 수 있는 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만화를 보는 사람과 게임을 하는 사람은 연령대를 불문하고 상당히 폭넓게 존재하면서도 시장은 망해 가고 있고, 딱히 그 사람들의 입장도 대변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품의 형태건 사회적 위상의 형태건, 어느 쪽으로든 말이죠)‘향유’하는 사람은 있지만 ‘소비’하는 사람은 없고, 다들 만화는 보지만 만화 보는 사람은 병신 취급 받는다는 결론이죠.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한국의 ““ ””들에게 한없이 불만스러워지는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시장에 참여하면서도 시장을 보호하지 않는 것도, 문화물을 향유하면서도 다른 향유자를 비난하는 것도 전부 ““ ””의 범위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끼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만화를 전혀 안 보고, 게임도 안 하는 사람들은 이쪽 세계에 아예 아무런 발언력도 영향력도 갖지 않습니다. 문제는 소위 비주류 문화라는 게임과 만화와 그 정도로 무관한 사람이 우습게도 거의 없다는 점이죠. 다들 조금씩은 발을 담그고 있습니다. 시장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이란 이야기에요. 우리가 만화책을 사 보는 사람을 무신경하게도 ““저런, 별난 친구””라고 말하는 순간, 은연중에 우리는 ‘시장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입장으로부터 자신을 열외시키는 중입니다. 돌아서서 그 사람은 ““만화는 아주 가끔 보는 거고, 사실 한국 만화가 망하더라도 나완 큰 관계없지”” 하는 식으로 이탈하고, ““그나마 관계 있는 건 저렇게 사서 보는 오타쿠 놈들 정도 아닐까?”” 하는 식으로 대상화하고, ““어휴, 저런데 돈을 쓰다니 병신새끼, ㅉㅉ””하고 적대시하면서 자신의 책임성을 철저하게 조각합니다. 이제 자신은 사회적으로 비난 받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오타쿠 집단과 내적으로 완벽하게 분리되었고, 인터넷에서 행여나 만화 사보자거나 명작 운운하는 놈들에게 ““오덕인증 ㅊㅋ염”” 하고 키보드워리어질을 하면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준비를 완료했습니다. 그렇게 이탈하면서, 그렇게 적대시하면서, 자신과 관계없다는 식으로, 모두 시장의 파괴와 패망에 적극적으로 일조하고 있는 중인 겁니다. 사실상 한국의 오타쿠 집단이란 건, 거의 다수의 책임회피 필요성에 의해 가상으로 상정된 집단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안적인 의미에서 ““ ””라는 좀 더 포괄적인 책임집단을 주장하는 거구요.


한국의 문화산업 중에서도 서브컬쳐라 불리는 것들은 어째서 이처럼 내부집단의 분열증적인 이탈과 적대시의 십자포화에 시달려야 하는 걸까요. 그건 기본적으로 통과의례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 서브컬쳐의 위상과 관계된다고 봅니다. 과거에 딱지와 구슬이 그랬던 것처럼, 그건 그 시기에만 몰입이 허용되는 치기 어린 행동이고, 일정한 시기가 오면 "동생들한테 아끼던 구슬상자를 물려주는 식으로" 졸업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오타쿠, 폐인, 즉 ““ ””들은, "나이에 맞지 않게 쓸데없는 곳에 시간과 정력을 쏟고 있는 덜 떨어진 사람"으로 여겨도 무방하게 인식되는 것이죠. 왜 한국에서는 애니메이션 이야기를 하려면 사회적 생명을 걸어야 하는 것일까요? ““ ””들마저 스스로 병맛크리 자학개그로 열폭하는데만 바쁘고, 누구도 이 취미를 대변하거나 적어도 공존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것일까요? 상대의 취미에 대해 이토록 엄격한 사회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이 상황에서 누군들 이탈하고 싶지 않을까요? [내 여동생이 이렇게 귀여울 리가 없어]의 여동생 마냥 자기분열에 시달리는 게 당연합니다.


그럼 서브컬쳐의 위상이 변화할 수는 없는 걸까? 씁쓸한 이야기지만, 한국에선 삶의 엄숙함이 인간을 질식시키고 있습니다. "먹고 사는 고민"은 모두에게 짐이죠. 학생 때는 인생의 모든 것이 온전하게 학벌경쟁에 바쳐져야만 그 삶을 정당화할 수 있고, 졸업 후에는 인생의 모든 것이 온전하게 취업과 결혼과 주택과 주식에 바쳐져야만 그 삶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취미라는 것은 그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시기, 조건, 계급이 갖춰진 삶에 +a로서 존재할 때만이 정당화되곤 하죠. [화성인 바이러스]에 나온 오타쿠 보셨습니까?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일단 서울대라는 학벌을 손에 쥐고 있고, 정기적으로 일본에 가서 수백만 원어치 쇼핑까지 할 수 있는 계급에 속한 사람 정도는 되어야 ““개인의 취미니까, 존중해줘도 좋을 듯””하고 사회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릴 수준이 된다는 거였죠. 한국에는 [현시연]만큼 사실적인 ““ ””들에 대한 인식과정 자체가 없습니다. 당연합니다. 시장에 자신을 반영시키는데 실패하고 있는데, 사회가 문화물들을 통해 이들을 재인식할 동기가 부족할 수밖에 없죠. 마찬가지 이유로 [에반게리온]급의 사회적 소통도 나타나지 못할 것입니다. 아주 요원한 이야기죠.


지금 현실이 어떻게 바뀔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면 다른 문화산업들도 게임시장의 뒤를 따르고 말겠죠.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들러볼 만한 곳은 마사토끼 블로그 [blog.naver.com/masaruchi]입니다. 만화만 그려서 먹고 살기를 시도하고 있는 마사토끼 블로그에는 명맥이 끊겨가는 대표적인 문화시장인 한국만화시장의 구조적 문제와 그 해결책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실천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공간입니다. 여기서 마사토끼님의 견해를 잠시만 소개하자면, 이미 만화시장에 냉소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상 만화시장의 존재 자체에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들로, 막연한 대중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만화시장에 보다 절실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서 변화의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죠.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충분히 가능해 보이는 지점을 많이 발견해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를 ““ ””론에 적용시킨다면, 한정된 희생양으로서 상정되었던 오타쿠란 집단보다는 포괄적인 책임성이 강조된 ““ ””들의 모호한 다수에서, 작게나마 현실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원동력을 결집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럼 조금이나마 시장과 ““ ””들의 순환고리를 복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팽팽 돌아가는 선순환의 힘은 강고한 편견의 벽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킬 것이고, 생계에 질식해서 행복의 목을 조르는 한국 사회가 조금은 유연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 모든 것은 아직 가능성에 머물러 있고, 제 불만도 그대로 정제되어 있겠지만, 어쨌든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고 싶을 뿐입니다. 희망이 있냐고요? 아뇨, 그런 건 없죠. 기대를 안 하는 게 마음에 편하죠. 아마, 우린 안 될 겁니다. 파이팅.




원글 링크는 여깁니다.

http://www.nabulnabul.com/entry/01-%ED%99%A9%EB%8C%80%ED%9B%88_-%EC%96%B4%EB%96%A4-%EC%9E%89%EC%97%AC%EC%A0%81-%EC%A1%B4%EC%9E%AC%EB%93%A4%EC%9D%98-%EB%AA%A8%ED%98%B8%ED%95%9C-%EC%9D%B4%EB%A6%84%EC%97%90-%EB%8C%80%ED%95%9C-%EA%B3%A0%EC%B0%B0?category=1


여기 있으시는 분들은 대부분 요기 ""  "" 에 들어가실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구요.

정말로 한 번쯤 읽어 보실만한 글인 것 같습니다.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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