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
||
---|---|---|---|
작성일 | 2016-01-25 16:58:40 KST | 조회 | 2,143 |
제목 |
안도 유랑기:증기국 기행문
|
하루는 내 고우故友 선국이 사랑방으로 놀음을 왔다. 우리는 나룻배로 근처 못에서 뱃놀이를 하며 시를 읊었다. 차갑게 식힌 매실 주를 한 잔 걸치고 있노라니, 선국이 취기로 달아오른 얼굴로 이리 말하는 것이다.
"안도, 자네. 이제 조선도 바뀌어야 할 때네. 외국으로 나가 보게. 조선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게임들이 탄생하고 있어. 우리가 그들을 오랑캐라 여기며 평생 등한시 하면 결국 시류에 뒤쳐지게 될 게야."
그리고는 서양 담배를 입으로 뻐끔 거리며 피는 것이 아닌가. 하얀 김을 주전자 주둥이처럼 뿜어내는 모습이 참으로 맛나 보였다. 하여, 선국의 말이 어느 정도 내 최근 생각과 통하는 게 있었던 바, 나는 큰 맘 먹고 토지 몇 개를 팔아 증기선 아이디 한 개를 팠다. 부인 최씨가 노골적으로 힐난했으나, 사대부 한 번 뜻을 정하면 천지신명인들 막을 수 있겠는가.
내 증기선은 중인 기술자 이씨가 움직였다. 선체는 소나무로 만들었고, Hull에 엷은 기름띠 같은 철갑을 한 차례 두른 바 개선 장군처럼 듬직한 모습이었다. 함교는 양놈 담뱃값처럼 눕힌 직사각형 모양이었고, 그 위에 검은 기둥이 올려져 있었다. 필경 저 주둥 위로 증기가 배출되는 것이리라.
배는 노를 젓거나 바람을 받아 나아가는 게 아니었다. 대신 옆구리에 큼지막한 바퀴 틀을 붙들고 있었는데, 이씨가 말하길 보오일러라는 기관에 석탄을 양껏 퍼먹이면 신묘한 기계의 힘을 받아 바퀴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바퀴의 힘이 건장한 노꾼 수십 명과 맞먹고도 남는다니, 세상 발전하는 모습이 퍽 놀랍지 아니한가.
"출발하겠습니다, 선생님."
이씨가 작은 종을 울리며 말했다. 나는 바다에 적개심을 품은 듯 삐죽하게 돌출된 선체의 끄트머리에 섰다. 바람은 강했고 썩은 물고기와 조개의 냄새를 품고 있었다. 작은 철배는 아무 거리낌 없이 대해를 가로질러 나아가니, 그저 신묘하다고 밖에는 말할 길이 없음이라.
그렇게 서너 밤을 건너 물길을 가니 저 멀리 뭍이 보이더라.
"저기가 증기국입니다."
이씨가 말했다. 그의 코에 검댕이 묻어 있었다.
나는 배에서 내려 증기국의 부두를 한 차례 둘러 보았다. 과연 내 친구 선국이 말한 것처럼, 생경한 광경이었다. 우선 눈에 띈 건 뱃머리를 등지고 늘어선 수십 채의 건물이었다. 각 건물들에 큼지막한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양놈 언어에 약한 나는 점자를 짚는 소인처럼 떠듬떠듬 읽어야 했음이라.
건물 이름 중에는 밸부, 코오나미, 유우비, 캅콤, 배두수다가 있었고 또 EA, 거수투(Gust)가 있더라. 길 가는 사람을 붙잡아 거수투가 무엇인지 물으니, 그들은 요리집 '아툴리애' 를 군단처럼 거느린 거대 기업이라는 것이다.
사람들도 눈여겨 볼 만 했음이라. 우리가 정박한 독 주변에는 제법 큰 증기선들이 많았다. 거기서 내린 사람들 중에는 양모 옷을 입은 양놈, 구미 사람, 비단옷을 입은 중국놈, 월남 사람, 일본인, 그리고 가끔 우리 동포처럼 보이는 익숙한 얼굴들도 섞여 있었음이라. 하지만 그들은 출신국이나 피부 색으로 서로를 구분하지 않았음이라. 그들에게는 오히려, 그들이 속한 기업 이름이 더 중해 뵈였다.
나는 발걸음을 떼어 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하늘님을 찌를 듯이 솟아오른 건물들이 만든 그림자를 이부자리 삼아 저잣거리가 있더라. 생경한 살색을 가진 오랑캐들이 진귀한 외국 게임을 팔고 있었다. 이씨가 귀띔해 주었다.
"이것들이 바로 독립 게임입니다."
과연 독립 게임들은 신기한 것이 많았다. 나는 픽셀 게임을 좀 해보고, 시뮬레이숀을 좀 즐겼다. 그러자 어느새 해가 울퉁불퉁한 지평선 너머로 잠겨가고 있었다. 하늘은 물에 푼 소 피처럼 아련한 분홍색이었고, 길가마다 늘어선 가스등에 유령같은 불빛이 새어나오니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이 증기국에는 떨이 캐쉬템을 심는 소달구지도 없고, 액티브 X 없는 도로는 흙먼지 날릴 일 없이 정갈하니 수 시간을 걸어도 내 도포 밑단이 여전히 반질반질 했음이라.
이씨와 나는 허기가 져 식당에서 요기를 하기로 했다. 나는 그 유명한 거수투의 아툴리애를 찾았는데, 현관으로 들어서자 마자 그만 기겁하고 말았다. 거기엔 분을 발라 피부가 허옇게 빛나는 젖먹이 계집들이 음식을 퍼나르고 있는데, 눈가와 입가의 화장이 진하고 요염한 기색을 띄며 하늘한 의상이 범상치 않으니, 이들은 차라리 창기娼妓에 가깝지 아니한가.
나와 이씨가 머뭇거리고 있노라니, 앙칼진 계집 하나가 우리를 끌고 구석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여아의 이름은 소오피라 했으며, 거수투에서 일한 지 이제 막 수 개월을 좀 지났다고 하더라. 나는 혀가 구식이라 마리식 PS 연금술 전채 요리를 먹었고, 이씨는 호기 있는 사내답게 에스카와 로지를 먹었다. 처음 보는 요리였으나 흥미가 당기는 맛이니, 과연 아툴리애 요리점을 군단처럼 거느린 거수투의 뒷심이 허상이 아니도다.
밤이 깊어 우리는 적당한 숙박집을 잡고자 했는데, 귀신같이 길가를 점령한 창기들이 나를 유혹했다.
"비주얼노불 게임입니다." 이씨가 말했다.
"비주얼노불! 그야말로 창기들의 영역이 아닌가? 청정한 증기국에도 그런 천한 관습이 있단 말이더냐?" 내가 실망하여 탄식하니, 포주로 보이는 험상궂은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리 말하는 것이다.
"증기국에서 미천한 신분은 없소. 돈 벌이만이 있을 뿐이지. 그리고 우리는 오입질하는 행위를 엄격히 금하고 있으니 선비님도 건전하게 즐길 수 있을 것이오."
창기를 데려와놓고 오입질은 금하다니, 이 무슨 모순되는 망언인가? 그러나 흥미가 동한 나는 창기들의 모습을 좀 보기로 했다. 그러나 바로 실망했다. 양놈 시전의 첨단尖端이라 하는 증기국답게 여자들은 모두 양놈 입맛에 맞춰져 있었다. 피부가 밝고 머리털은 형형색색이며, 안면의 3할을 차지하는 안구가 붉거나 파랗거나 하니, 억지로 북돋은 호기도 그 야시시한 풍경에 절로 수그러들게 됨이라.
몸은 또 어떤가. 목은 손아귀에 힘을 주면 툭 부러져 버릴 것처럼 가늘고, 어깨는 가벼운 볏짐이나 좀 들어볼까 싶게 좁고 둥글며, 젖만 비대하고 허리와 둔부가 보릿고개 넘은 개마냥 말라 있으니, 새끼나 제대로 칠까 싶었다.
그나마 가장 밥술이나 먹어봄 직한 계집을 하나 골라 이야기를 나눴으나, 내가 자주 즐기고 예뻐했던 조선 창기 서유리(*토종 게임 폐관자들Closers의 유명한 기생.)가 떠올라 마음만 울적해졌다.
"에잉, 일 없다."
나는 엽전이나 몇 푼 던져주고 창관의 틈바구니를 헤쳐 나왔다. 우리는 근처 숙박집에서 잠을 잤다.
|
||
|
|
||
|
|
||
|
|
||
|
|
||
|
© PlayXP Inc.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