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베가 처음에는 걱정스러웠을 뿐, 그 이상의 감흥은 없었습니다.
비유로 치자면 매우 과격하게 노는 아이들 느낌이랄까? (물론 나이드신 분들의 사이트 패악질은 무서웟지만)
애들도 잘 보면 잔인하게 놀잖아요 동물들 막 잡아죽이고 ㅇㅇ;
그려러니 했죠 하는 수도 없고 뭐 저러면서 크나보다 ㅇㅇ;
고인드립도 어떻게 보면 잘못된 거지만, 또 어떻게 보면 우리들도 실생활에서 맨날 하는 것 아닌가요?
당사자 없을 때 뒷담화하고, 욕하고, 밑 사람이라고 함부로 대하고, 유흥업소가고..
크게 보면 우리랑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개개인의 악의 합은 전체의 합이 아닌 거라고 여겼죠.
2. 문제는 이 여김이 얼마나 오판이었는가를 뼈저리게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어느날 하나의 가정이 머리 속에 떠올랐습니다.
저번 취재에서처럼 '어떻게 일베란 사이트가 이렇게 크고, 또 청소년들의 대표적인 놀이 커뮤니티, 혹은 화젯거리가 되었을까?'
또한 일베를 반대하는 몇몇 생각 깊은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하나 의문점이 들었죠.
그 분들은 일베가 '노무현, 김대중 대통령'을 희화화하기 때문에 비판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그들의 논리대로, 그건 '좌파'에서도 허구헌날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전라도가 엮이고, 좌익 세력이 엮이고, 종북과 진보가 동일시되며, 일베 관련 글들을 접하는 분들이 전체적인 '세뇌'과정을 거친다는 데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거기에 제 생각을 첨부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극적인 일베에 길들여집니다. 또한 동시에 일베는 '세상'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고, 일베만을 믿게끔 간접적인 시야 수술을 합니다. 조금씩 조금씩 망막을 붉은색으로 물들이는 것으로 비유해볼 수 있겠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일베 이용자들은 모든 것을 붉게 봅니다. 붉지 않은 것들은 일베에서 제공하는 '팩트', 더 정확히 말하면 자신들에게 불리한 말들은 소거하고 유리한 것들만을 부각시키고, 종국엔 불리함이 사라진, 균형을 잃은 자료를 제공해 붉게 보이게끔 합니다.
사이비 종교 등에서 이용하는 전형적인 세뇌 과정이기도 합니다.
전라도와 노동자, 여자 등 사회적인 약자들에 대한 공격이 문제가 아니라, 그 공격을 당연시 여기는, 머리 깊은 합리화가 더욱 무서워졌습니다.
그리고 일베가 유명해지며 일베를 접하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세뇌과정들, 흥미와 떡밥거리에 중독된 나머지 그것들 아래에 은밀히 숨겨진 메시지를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우려했습니다.
즉, 사람들이 점점 일베에 세뇌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3. 하지만, 제 생각은 오판에 불과했습니다.
2번에 적은 세뇌는 아무것도 아닌 소름끼치는 현실을 접했습니다.
바로, 일베보다 세상이 무섭다는 사실입니다.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제가 몸담고있는 이 조그만 땅은 불지옥같고 아귀들이 득세하는 검은 땅에서 몇없는 풀밭이며 낙원이며, 그렇기에 어쩌면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풀 한 포기 더 심어봤자 금방 불타없어지며 무엇보다 제가 풀을 통해 위로하려는 이가 바로 풀을 태우는 장본인이니까요.
자세히 풀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전 일베가 세상을 세뇌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일베가 문제라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세상은 일베에서 펼치는 논리의 수십배만큼의 강도가 버젓이 행해지는 곳이었습니다.
일베가 오히려 '매우 약함'이었습니다.
오히려 일베는 세상의 반영, 거울이었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세상에서는 일베가 써먹는 세뇌를 통해 상대방을 그침없는 악의와 타인의 불행을 보고 말초신경의 쾌감에 사정하는 자들, 죽은 동태눈깔보다 더욱 멍한 눈으로 타인의 불행을 관조하는 무관심한 자들만 있다면, 적어도 일베는 그런 세뇌를 통해 미약한 유대감으로 뭉쳐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약자들에 대한 괴롭힘은 자신이 당한 대접을 반복해서 누군가에게 베품으로써 스스로가 약자라는 사실에서 도피하는 기제에 불과했습니다.
전두환과 박정희로 대표되는, 철권과 독재 정치에 대한 추앙은 만화 신암행어사에 나오는 인물들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원술과 원효, 모두 충성과 명령에 복종하는 인물들이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거나 혹은 자신의 삶이 타인과 분리되었다는 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비틀렸지만 올바른 주인공인 문수가 떠나자, 혼란에 빠진 두 인물은 절대악인 해모수(아지태)를 섬깁니다. 아지태가 어떤 인물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지태는 명령하고, 혼란에서 구제해줍니다. 아지태가 약자들을 죽이라 해도 망설임없이 따릅니다. 아지태는 추악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으로부터 도피하게 해주는 구세주입니다.
임상심리학, 실존 정신분석학에서는 약자에 대한 폭력을 '가장 헐겁고 나약한 고리'로 비유합니다. 어떤 사회의 정체성이 흔들릴 때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삼고 그를 처형하는 의식을 치룸으로써, 사회를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필사적인 시도라는 것이죠. 이 학문들은 왕따와 따돌림, 가족 내에서 비정상적으로 구성원 하나를 괴롭히는 것, 사회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비인륜적인 행태, 범죄 등을 이를 통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즉, 일베가 약자들을 공격하는 이유는, 그들이 싸이코라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삶을 정당화하고 안정을 추구하기 위한 절박함을 표현하는 수단인 셈이죠.
그런 자들이 공중파에 오를 정도로 큰 화두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커다란 위기가 도래했음을 암시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었고, 그거만 해결하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은 상황 말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등장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도 모르고, 아니 그 문제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아무도 모르는 '문제가 문제인' 상황이죠.
일베는 신암행어사에서의 원술과 원효입니다.
테란도 원술과 원효입니다. 세 종족 중 가장 약자죠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