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수능이란 제도, 아니 현재 모든 사회 근간이 되는 제도들이 무서운게 우리는 그것이 일부, 아니 상당수 결코 '옳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새 수용하고 자신의 가치와 존재를 '스스로' 외부 제도에 재단하기 때문임.
아래는 도갤의 개념 겔러 너구리님의 글을 퍼옴.
1.수능 점수로는 사람의 가치를 측정 할 수 없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째서 이 문제(시험을 잘쳤는가, 못쳤는가)에 그리도 일희일비하는가. 아니 그 이전에, 어째서 이러한 조잡한 방법으로 '인간의 서열'을 매기는가?
2.('가치'가 아니라 '능력'의 관점에서도) 사람의 능력을 수능으로 측정할 수 있다는 말은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나는 나보다 '모든 면에서' 우수한 사람이 있다고는 믿지 않으며─예컨대, 마찬가지로 어제 수능을 본 내 동생의 오빠 역할을 나보다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없다. 왜냐하면, 나는 수십년동안 그녀석의 오빠로써 함께 살았었기 때문이다─, 있다고 해도 그것을 수능점수로 평가하여 가려낼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3.역시 문제는 수능이 권력 배분의 형식이라는 것, 후천적인 신분 상승의 기회라는 것에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것은 본질적으로 국가-대학 등이 연합한 범죄다. 왜냐하면 이것은 앞에서 말했던 이유 등으로 인해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밝혀졌기 때문이다.(비합리적인 기준, 비합리적인 서열...) 그러므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이러한 폭력 시스템이 무너져야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4.이쯤되면 으레 나오는 말은 대안이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대안인가? 혹시 인간의 가치를 측정해, 그 서열을 세세히 나눌 수 있는 다른 방법(이를테면, 교육시스템)을 제시하길 원하는 것인가? 하지만 나는 그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또 그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상대적으로 소수일지, 다수일지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기준에 맞지않는 누군가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된다.
5.내 생각에, 유일한 해답은 비틀즈의 가사처럼 그저 내버려 두는 것이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해방하라. 하고 싶은 것을 하게하고, 거기에 어떤 가치평가를 하지말라. 삶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면, 어떤 하나의 기준으로 아이를 강압하지 말고, 오히려 아이들이 으레 하기마련인 유치한 '호작질'처럼 보이는 것들을 진지하게 도와주라. 그러면 아이들 각자의 내부에 숨겨진 힘이 그들을 올바른 곳(물론, 서로 다른 그들 각자의 길)으로 이끌 것이다.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6.그런데,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있다. 그렇게 살다간 심지어는 생존조차 하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숨쉬기위해 사는 것을 포기하는 행위이다. 루소가 말한대로, 산다는 것은 숨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활동하는 것, 관계하는 것, 자신과 세계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행복하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란초는 간단한 이야기만 해줬어요. 제가 원하는 것을 하라구요. 그러면 일이 놀이 같을 거라구요."
"5년 뒤에 네 친구들이 좋은 차에 큰 집을 가진걸 보면, 너 자신을 저주할거다."
"전 공학자가 되면 좌절하고 아버지를 저주할걸요. 차라리 저를 저주하며 사는게 낫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다 비웃을 것이다. 까푸르씨는 '아들이 ICE에서 공부하다니 복이 많네요'라고 했는데 지금은 뭐라고 하겠냐?
니가 무슨 드라마 주인공이라고 되는줄 아는거냐?"
"저는 아버지를 설득하려는 거지 협박하고 싶은게 아니에요 제가 사진작가가 된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요?
돈을 적게 벌고, 차도 작고, 집도 작겠죠 하지만 저는 정말 행복할거에요.. 정말 행복할거에요 ..."
- 영화 '세얼간이',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 중에서... -
"내게 햇빛을 주세요, 비를 내려주세요, 한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다시 성장하고싶어요" - 마찬가지로 영화 '세얼간이' 中 -
"그 누구도 아닌 자기 걸음을 걸어라. 나는 독특하다는 것을 믿어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설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걸음으로 자기길을 가거라. 바보같은 사람들이 무어라 비웃든간에." -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 키팅 선생의 대사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