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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이콘 김강건
작성일 2013-06-10 01:25:41 KST 조회 273
제목
하드보일드 인생

"언제나 첫 문장이 가장 중요하다." 사람들은 내게 강요하듯이 말했다. 그들은 정말로 실력 있는 평론가들이라면 첫 문장만 봐도 글 전체의 흐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첫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원고를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다고. 그래서 나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의 첫 페이지를 살펴 보았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요제프 기벤라트 씨는 중개업과 대리업을 했다.>, 안녕히. 헤르만 헤세여. 나는 이 첫 문장을 읽고나서 희미한 조소를 흘리며 원고 뭉치를 쓰레기통에 구겨 넣는 한 독일 출판사 편집자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세계대전의 상처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던 독일 메르헨의 거장은 그렇게 모든 광명을 잃었을 것이다. 중개업과 대리업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나 진부한 단어들이니까.


그런데 여기까지 글을 쓰고 나서 한 가지 떠오른 사실이 있다. 바로 내가 그 중대한 첫 문장을 이미 넘어갔다는 사실이다. 자, 이제 모든 글 쓰는 이들을 괴롭히는 첫 문장의 난제를 해결했으니, 나머지는 식은 죽 먹기이리라.


그 날도 나는 병원에 들렀다. 언젠가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웬지 몸이 불편하다는 느낌을 줄곧 받아왔던 것이다. 의사 선생은 XX대학 의대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 사실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어느 날, 내 불안한 눈초리를 감지했는지 의사 선생이 내게 물었다.

"어디 불편한 점 있으세요?"

"어떻게 아셨죠?"

"환자들 대한 지 벌써 몇 년째인데...당연히 알죠. 불편한 게 있으면 말해봐요."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몇 달간 그를 만나며 관찰해 본 바, 어깨를 으쓱하는 건 그의 주된 버릇 중 하나였다.

"아니에요. 이건 선생님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예요."

"해걸할 수 없다고 해도 말이죠. 몸이란 심리 상태의 영향도 받는다구요. 무엇이 환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지 알아야 치료도 수월하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나는 단번에 그 말이 빈 말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요 몇 달간 그는 나를 진찰해 왔지만, 정작 내가 앓고 있는 병이 무엇인지 짐작 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윽고 드디어 입술을 뗐다.

"어쨌든 처방전을 받아 가세요. 다음 주에도 한 번 더 봅시다."

그는 재빨리 말하며 내 말문을 가로막았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오래 전 나는 여러 출판사들을 전전하며 내 글을 선보였다. 내 글은 당시 역병처럼 유행하던 해체주의 미학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글이었으며, 그 내용은 온통 토르소와 (입증되지 않은 프로이트의 이론들을 근거로 삼은)정신분열에 대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출판사 사람들은 언제나 나에게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이봐요. 글에 맥락이란 게 없잖아요."

나는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맥락 없는 글을 좋아했다. 그 날도 어김없이 퇴짜를 맞은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서점에 들러 새로 나온 소설책 한 권을 샀다. 그 작가는 두서없는 글을 썼지만, 맥락은 명확했다. 소설가들은 자신들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들은 숙명을 믿는다. 현실의 모든 사건들이 개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믿는다. 그들은 맥락 없는 글을 결코 인정하지도 않고, 쓸 수도 없다. 현실의 단두대가 느닷없이 그들의 목을 내려칠 때까지도 작가들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봐요?"

"선생님 말을 어떻게 믿죠?"

나는 의사 선생에게 대뜸 쏘아붙였다.

"네?"

"선생님의 말은...그러니까 나는 선생님 학위 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구요. 선생님이 내 몸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건지 뭔지 장담을 할 수가 없어요. 나는 그냥 권위에 의존할 뿐이잖아요."

"흠. 누구한테 그런 말을 들었죠?"

"움베르토 에코요."

"그 사람이 누구죠?"

"이탈리아의 학자입니다."

"직접 만나서 들었나요?"

"아뇨. 책으로요."

"그럼 당신은 권위에 의존하고 있잖아요?"

"흐음."

나는 처방전을 받아들고 얌전히 집으로 돌아갔다.


"흐음."

그것은 선생님의 말버릇이었다. 그녀는 내 글을 슥 훑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넌 훌륭한 소설가는 되지는 못하겠구나."

"그래도 훌륭한 문장가는 될 수 있겠죠."

내가 무슨 의미로 '문장가' 라는 단어를 선택했는지는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부터 나는 문장을 담금질하는 일에 몰두했다. 그것은 미시세계의 물리법칙을 거시세계의 존재가 탐구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단어가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자리에 놓여야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얕은 통찰력, 형편없는 추리력, 굳은 혀, 진부한 비유, 거추장스러운 수사, 동어반복, 그리고 다시 동어반복...


아버지가 죽은 이후로, 나는 일종의 계시를 받았다. 내 몸 속에 잠복하고 있는 어떤 파괴적인 유전자로부터?

나는 49세에 죽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현관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베란다 쪽으로 돌아갔다. 베란다는 두 개의 거대한 창문으로 막혀있다. 나는 창문을 깨고 힘껏 몸을 구르며 방 안으로 난입했다. 일어서서 자세를 가다듬으니 어깨에 박힌 유리조각들이 살을 긁으며 굴러 떨어진다. 나는 품 안에서 권총을 뽑아 쥐고, 벽을 더듬으며 서서히 안방으로 간다. 안방은 사람의 인기척으로 가득하다. 마치 나를 도발하는 것 같다. 순간 안방 안에서 무언가 육중한 것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나는 안방 안으로 몸을 던지며 권총을 겨눈다. 안방 안은 수많은 거울들로 가득하다. 수십, 수백, 수천 개로 분열된 반사면이 모두 총을 겨눈 내 모습을 비춘다. 정면의 내가 나를 겨누고 있다.


---


이 글을 본 사람들은 "흠,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을 베꼈군." 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사실 영화 <토토의 천국> 을 베낀 것이다.

그것이 이 글의 진정한 반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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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A-27크롬웰 (2013-06-10 02:35:17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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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 제대로 본 게 없어 fail
아이콘 어그로중독자 (2013-06-10 07:51:37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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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게로 가버렷
아이콘 개념의극한 (2013-06-10 11:59:59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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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 자게로
아이콘 개념의극한 (2013-06-10 13:22:52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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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명문인듯 근데 레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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